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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수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3-09

조회 288



경상우수군(慶尙右水軍)

난중일기 1592년 4월 15일 (甲辰). 
맑다.  (中略)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元均)의
통첩이 왔는데,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
(影島)에 닿았다." 고 하였다. 같은 시각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朴泓)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고 한다."
고 하였다. 즉각 장계를 띄우고 순찰사, 병마사,
우수사(전라우수사 李億祺)에게도 공문을 보내다.
영남관찰사(金睟)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영은 오아포(烏兒浦)에
있었고, 지금의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 일대입니다.
경상우수사는 원균으로서 임진년 2월에 부임하여
73척의 군선을 지휘하였고 그 관하에 9관 19포를
두고 있는 조선에서 제일 큰 수영이었습니다.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 의하면 "우수사 원균
(元均)은 우수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배
한 척만 보존하였을뿐입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들인데도, 하는 짓들이
이러했으니 그 아래의 장수나 군사들이 어찌
도망치고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선조실록 1592. 6.28)

경상 감사 김수(金睟)의 장계에도 "수사 원균은
수군의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
(內地)로 피신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을
시켜서 고을 창고를 불 지르게 한 결과 2백 년 동안
저축해 둔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
(선조실록 1592. 6.28)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지 2달만에 조직을
미처 장악하기도 전에 전쟁이 일어났으니 어느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전선에 있는
국방의 책임자로서 경상우수군의 운영 방법은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경상우수영은 일본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진해만
일대의 연해지역과 거제도를 점거하여 종전 때까지
조선수군과 공방전을 벌이며 임진왜란 기간 내내
일본군의 세력권 하에 있었습니다.

경상좌수영도 경상우수영도 일본과 직접 맞닿은
최전방이므로 총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오늘날 역사적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최전선은 전쟁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지니스의
세계에서도 지금의 코로나19 방역 의료현장에서도
최전선은 가동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초기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상우수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상우수사,
경상우수군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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