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해온 일본!
선조수정실록(1606년 12월). 회답하러 가는 사신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 서장관 정호관(丁好寬)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가강(家康)이 여러 번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명목을 붙이기 어려워서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가강이 편지를 보내어 굳이 청하므로 드디어 회답하러 가는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보내니, 사람들은 모두 원수를 갚기도 전에 통신사를 앞질러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서 1607년 선조 40년에 처음으로 파견 되었습니다. 1605년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正)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교섭으로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오면서 우리나라의 남녀 3천여 명을 찾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1607년 일본에 회답하러 갔던 사신 여우길 등도 붙잡혀 갔던 남녀 1,240여 명을 찾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 가슴아픈 역사인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매사에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은 나라와 그 백성들이 겪은 전쟁의 상처 입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어떠하였으며 끝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살피는 것 만으로도 미래의 통찰력은 제대로 가질수 있습니다. 이것이 리더의 덕목이자 전략 입니다.
한.일 양국간의 평화를 위한 국가 외교사절단의 시작이 대의명분을 살려 회답하러 가는 형식(회답 겸 쇄환사)으로 출발 하였으며 조선통신사의 파견과 접대로 양국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경제적 부담으로 힘들어지자 1811년 대마도까지를 마지막으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자성대 공원은 임진왜란 전의 부산진성과 임진왜란 중의 부산 왜성과 임진왜란 후의 부산진성으로 함께 어우러진 역사적인 장소로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비석들과 누각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으며 별로 관심없는 동네 산책길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통신사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해신제를 올렸다고 하는 영가대도 있었습니다. 한바퀴 둘러 보면서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바램과 함께 이제는 우리 리더들의 사명감과 책임감도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나 훌륭한 역사를 돌보지않고 방치해 놓을때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은 고사하고 우리의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 조차도 알 수 없어 세계속의 글로벌 협상이나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420년전 일본의 침략으로 온 나라가 유린 당했지만 선린관계 회복을 위하여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며 한 발 양보하고 문화교류를 통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다시는 침략하지 말도록 노력 한 조선의 지혜를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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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새해아침 이순신포럼 이부경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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