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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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의 일본측 기록 -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조선의 장군 신립은 하천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조선의 병졸들은 도망가고, 혹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조선의 대장 신립도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때 조선 군중에서 키가 7척이나 되고 얼굴에
수염을 좌우로 기르고 두 눈이 크고 둥근 조선의 장군이 온
몸에 피를 흘리면서 큰 도끼를 들고, 황토색 말을 타고 나타나
"김여물이 바로 나다." 하고 크게 꾸짖으며 고니시 유키나가
진영으로 단마로 달려 들어와 (일본의)갑옷 군졸 8~9명을
베고는 20여 합전을 벌였다.
이때 황어전감좌위문(荒御田勘左衛門)이 횡창을 들고 들어가
김여물을 말에서 끌어당겨 땅으로 떨어뜨리니 군졸들이 모여들어
그의 목을 취하였다. 조선군 대장 이일은 이 와중에 동쪽 산
계곡으로 도망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투에서 조선군
3천여 급의 수급과 함께 승첩을 히젠국 나고야에 보고했다.
- 윤인식의 [역사추적 임진왜란] - 에서 발췌
422년전 오늘 왜적들이 부산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부산진성은
그 다음날 14일에 무너집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적에게
24일 상주전투에서 이일 장군이 패배 합니다. 4월26일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충주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28일에는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은 달천 강가에 몸을 던집니다.
어제 (사)중소기업융합서울연합회 소속 이산산악회와 함께 한 조령,
탄금대 역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정말 우리가 다시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실패의 리더십 체험 코스였습니다. 모두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 앞에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왜적들이 한성을 함락 시키고자 넘었던
그 길을 우리도 왜적이 되어 걸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되어 걸었습니다.
조선측 기록에는 신립 장군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일본측 기록에는 조선의 김여물 장군은 단마로 일본군
진영에 뛰어들어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매우 용맹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 사카이시 도아라타 신사 마츠리에서)
그 옛날 험난했던 과거 길이 지금은 트래킹을 할 수 있도록 잘 닦여진
길이 되었지만 이 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읽을 수
있을것인가? 제2관문 바로 전에 있는 교귀정(경상 감사 혹은 관찰사의
이취임식장)에서의 명상은 우리에게 많은 메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나는 부하의 의견도 무시하고 고집대로 밀고 나가지는 않는지, 주위의
좋은 인맥이나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후회막급한 결정은 하지 않는지, 인사정책을
원칙없이 행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봅니다.
신립 장군뿐만 아니라 북상하는 왜적들에 맞서 싸웠던 신길원 문경현감의
충렬비 앞에서, 조령 둔전관으로 탄금대 전투 후에 새재를 요새화하고
지키셨던 신충원의 충주 관방론을 살펴보며, 신립 장군을 따라서 조령에
갔던 신흠 양재 찰방의 상촌집을 읽으며, 그 외 많은 이름없는 무명용사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감사와 존경의 예를 올리고 돌아섰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선조임금인가,
신립 장군인가, 이순신 장군인가, 아니면 명나라의 신종임금인가, 그도 아니면
왜적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인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기분좋은 봄날, 아직도 산벗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가며 글로벌 시대의 리더로서 철저한 시장조사와 디테일한 현황분석
그리고 리스크 매니지먼트까지 계산한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았습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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