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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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는 충무의 자식이로소이다!
저술자 왈 정조 조에 직제학 서유방이 계문에 이순신의
아들 면이 동자로 적을 쳐서 적병 세 명을 사살하고 인하여
싸움에서 죽었거늘 오히려 아직 포장을 입지 못하니 실로
소대의 흠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왕은 대신에게 물으셨다.
영의정 채제공이 아뢰길 "순신이 통제사로 있을 때에 그 아들
면이 고향 집에 머무르다가 한 부대의 적을 만나 도리어 장수
세 명을 죽이고 자신 또한 전사하니 그 때 총각이라. 진실로
부끄럽지 않는 충무의 자식이로소이다." 왕은 이조참의의
직을 증직하사 포창하였다.
- 회정 김기환 저 [李舜臣世家] - 에서 발췌
아버지는 나라를 지키고 아들은 고향을 지키고...
왜적들은 울돌목에서 바닷길을 뚫지 못하고 다시 이순신에게
명량대첩이라는 큰 명예를 안겨 주었습니다.
적장인 구루지마 미찌후사의 목까지 돗대에 내걸린 이상
기가죽어 더이상 나설 수 없게 되자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가족들을 잡아다가 군중에 볼모로라도 삼으려고 하였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냐, 그렇다. 나는 이 통제의 셋째 아들 이 면이다. (중략)
벽파진의 원한을 못갚아서 충신의 고향집을 습격하여 그
가솔을 해하고자 하니 그런 야만적 계획이 어디 있겠느냐?
내 말을 너의 상장에게 전하라 그렇지 않거든 나와 한 번
격투하여 사생을 결단내자." 라고 하였습니다.
21살의 청년의 당당한 고함소리에 왜적들은 기가 꺽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셨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용기이며 기개에 찬 울림 입니까?
며칠 후 [통곡]이라고 쓴 편지가 전달 되었을때 장군께서는
개봉하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심기가 어지러웠다고
난중일기에 적었습니다.
두 아들은 함께 종군하고 세째 아들은 고향을 지키려다 이런
변을 당했으니 어버이로서의 애통한 마음은 통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듯 얼마나 상심하셨을까요?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가 의지를 곧게 하고
올바른 일에 힘쓰니 아들 또한 아버지의 뜻을 본받아 올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임으로서 자식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돕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 면공의 기일 입니다. 현충사 안에 이 면공의 묘소가 있습니다.
시간이 나실 때 한번 찾아가 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사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라도 정조 임금께서도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포창(褒彰)하셨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세째아들 이 면! 이순신 장군도
지극한 효자이셨지만 세째아들 또한 부모님를 모시는 올바는 효심을
다시 한 번 보여 주는 좋은 사례로, 지금 이시대에도 그 뜻과 행실이
통하는 귀중한 가족에 대한 사랑 입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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