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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다른 이름, 군량 전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10-19

조회 21,261



또 하나의 다른 이름, 군량 전쟁!!

1595년 10월 17일(丙辰).
맑다. 아침에 가리포(李應彪),
금갑도(賈安策)가 와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였다. 진주 사람
하응구(河應龜), 유기룡(柳起龍) 등이 군량미 지원조로
쌀 20섬을 가져와 바쳤다. 부안의 김성업(金成業)과 미조항
첨사 성윤문(成允文)이 와서 보았다. 정항(鄭沆)이 보고하고
돌아갔다.

- 박기봉의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 -
마초가 완전히 없어져 공급될 수 없고, 길옆 들판은 왜병들이
모두 불을 질러 사방의 산이 깡그리 불타 한 치의 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파주 경내가 더욱 심하여 100리 안에는 촌락이
없습니다. 그 참혹함을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명나라 대군이 행군 중인데도 군량과 마초는 모두 떨어졌습니다.
말은 죽어 길에 널려 있고 살아남은 말들도 너무 야위에서
전쟁터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가슴을 치고 답답해
울부짖어도,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 송복 지음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 에서 발췌

피로 쓴 교훈, 임진왜란의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은 군량 전쟁
입니다. 이순신은 둔전을 일구어서 군량미를 스스로 마련하며
전쟁을 하였으며, 유성룡은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해 병이나서 몸져 누울때까지 국가의 위기를 떠맡고 있었습니다.

군량미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가려질
정도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에 펼쳐졌습니다.
군마도 굶어서 죽는 마당에 명나라 군대를 움직여서 함께
전쟁터에 나가자고 해야 하는 외교적인 노력도 해야하는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군량은 국부에서 나오는데 그 당시 조선의 국부는 너무도
빈약하여 명나라 군대는 커녕 조선의 군대도 먹일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그 다음차례인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군량미를 바다를 통하여 조달하고자 했던 왜적들의 수륙병진
전략이 이순신에 의해 좌절 되자 평양에서 한 발자욱도 떼지
못하고 겨울을 났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충이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지요. 결국은 그 이듬해 한양으로 철수하고 또 다시
아예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군량미를 확보 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을
그만큼 확실하게 확보한다는 것 입니다. 이순신은 군량미
확보를 위해서 해로통행첩을 발행 한다든지, 소금을 구워
팔고, 물고기를 잡아서 팔고, 군수물자가 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였습니다.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며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이중고의 너무도 힘든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회사의 경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 합니다. 현금확보를
어디까지 하느냐가 관건이지요. 자금의 흐름이 원활할 때
신규사업도 생각할 수 있고, 임직원들의 복리후생도 생각
할 수 있고, 미래의 비젼도 보다 더 확실하게 세워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는 것,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몇번의 경험으로 잘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이순신의 필사즉생의 각오로 헤쳐나가는 다할 盡, 유성룡의
헌신적인 멸사봉공의 정신, 참 眞, 이런 조상의 음덕으로
조선은 멸망하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나의 군량미! 한 번쯤은 재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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