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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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명상 - 이락사에서 첨망대로 가는 길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납니다.....
이순신의 최후 - 이충무공 행록(行錄)에서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공이 한창 싸움을 독려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이 말을 마치자 공은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에 공의 맏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활을 잡고 곁에
있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망극, 망극하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哭) 소리를
내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이 틈을 타서 기세를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시체를 보전하여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참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金伊)와 회(薈)와
완(莞) 세사람만 알았을뿐 비록 친하게 믿고 지냈던 송희립
(宋希立) 등도 알지 못햇다. 이들은 그대로 기를 휘두르며
계속 싸움을 독려하였다. - 후략 -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전서] - 에서 발췌
음력으로 11월 19일은 이순신 장군께서 순국하신 날 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신 마지막 바다,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
지난 11/16(금) ~ 17(토) 이파리 119차, 잘 다녀왔습니다.
남해 노량대교를 건너 충렬사에 들어서니 비가 내렸습니다.
마침 충렬사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뒷편에 있는 가묘에
헌화하며 묵념으로 인사드리고 이락사로 떠났습니다.
첨망대로 가는 길, 순국의 바다로 가는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만나 보기로 하였습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금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나약해진
나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 원칙과 기본은
지키겠다는 용기를 가져야만 실천할 수 있다는 것, 어떠한
역경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고 긍정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리더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감히 따라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매한 인격과 품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 되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적들이 철군을 한다고 하는데, 명나라나 심지어는
임금과 조정에서도 싸우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할 필요가
있겠냐고 돌아가게 내버려 두라고 하는 상황에서도 정의의
전쟁,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을 치르려고 하는
이순신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이 원수들만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도저히 생각
할 수도 없는 일편단심 구국의 일념으로 내린 한 발도 뒤로
물러섬 없는 의사결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음포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우리를 살려 내시고, 나라를 구하시고, 두 번
다시 이 나라를 넘볼 수 없도록 "마지막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하고 외치는 장군의 목소리는 지금의 우리에게 보내는
힘있는 그리고 희망찬 명령으로 들렸습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순신 장군
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자존감 넘치는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확실한 글로벌 국제질서 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4차산업
혁명으로 기업들이 총성 없는 경제전쟁에 힘들어 하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몸과 마음을 재장전 하는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첫 번째 화포가 맞지 않으면 두 번째 화포를 쏠 기회조차 없다고
200보 앞에서 눈으로 직접보고 직사포로 타격하라는 장군의
결전함대 운용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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