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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명나라 장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9-04-01

조회 20,015



화폐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명나라 장수!

선조실록 (1598. 4. 2.丙辰)
- (前略) - 임금이 말하였다.  "틀림없이 시행되지
못할 것이다."  " 이보다 앞서 경리 양호(楊鎬)가
상성(常盛)의 품첩(稟帖 : 장계)을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나라에서는 돈을 쓰지 않고 단지
쌀이나 베를 가지고 물건을 바꾸어 쓰기 때문에
화폐가 유통되지 않아 나라가 부유해지지 못하는 것
이다.  이 품첩에서 제기한 문제를 빨리 시행해보는
것이 좋겠다.  속히 토의해서 회보해 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보고 비변사로 내려 보냈기
때문에 이렇게 회답 건의를 한 것이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명황제는 1593년 4월 1일 산동지방의 군량 10만석을
내려주어 조선의 군량을 보충하게 해 주었습니다.
명나라가 조선 파병을 위해 221,500명,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832,000냥,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3,000,000냥이었습니다.

명나라 지원군의 군량미와 마초 등 조달을 담당했던 
유성룡 대감의 1593년 3월 말 장계의 마지막 구절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절규 하고 있습니다. 참혹한 조선의 경제사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은 국력이고 경제력인데
말입니다.

이를 보다못한 명나라 장수 양호가 화폐 사용의 적절한
충고를 하였으나 선조를 비롯한 호조의 여러 관리들의
인식은 화폐경제의 정착은 어렵다고 보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수준이었으니까요.

조선의 화폐경제는 1423년 세종 때의 조선통보,
1464년 세조 때의 전폐 등이있었으나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678년 숙종 때의 상평통보가
발행되면서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통용 되었고
상공업 발달의 촉진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유성룡 대감은 그 당시 군량미를 해결하기 위해
압록강 중강진에 중강개시 무역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군량은 물론 전쟁물자를 조달해야하는 절실한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둔전을 일구어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고 해로통행첩을 만들어 전쟁물자를 모으는
지혜를 발휘하여 조정의 지원 없이도 우리 바다를
지키며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농업에만 의존하던 국가 경제의 기반이 취약한 나라
에서 군대를 유지하고 백성들이 살아남도록 하는 일,
전투보다 더 힘들었던 경제전쟁을 잘 치루어 내신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오늘날도 통용 되는 것은
이러한 경제의 본질을 잘 이해한 경세가로서 문무를
겸비한 리더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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