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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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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정유년 12월 30일부로 올려 보낸 접반사 윤형(尹泂)과 충청도 절도사 이시언(李時言)의 급보는 이러하였다. (前略)  성 안에는 식량도 없고 우물도 없으며, 적의 졸병들은 밤을 타서 성에서 내려와 불에 탄 쌀을 주어다가 먹는 형편이었고, 성밖의 우물과 샘은 모두 메워졌고, 적의 무리들은 그릇도 없어서 작은 바리로 물을 떠다 마시는데, 옷을 물에 적셔다가 빨아먹고 있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30일에 왜적이 편지를 보내오기를 "강화하려고 하는데 성 안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다.  배 위에 중이 있는데, 내보내주면 가서 화의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後略) <선조실록 1598. 1. 14 (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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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12월 23일새벽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12일 동안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 장군을 대장으로 삼고 명군 및 연합군은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총 지휘하며 모두 5만여 명의 연합군과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울산왜성의 1만여명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해발 50m 정도의 작은 동산에 있는 울산왜성을 함락 시키지 못한채 포위를 풀고 철수한 명나라 군대를 부총병 이여매(李如梅)의 접반사 이덕열(李德悅)의 급보에서 다음과 같이 통곡 합니다.  "대체로 까닭없이 철수를 하여 적들이 그 뒤를 쫓는 바람에 급히 달아나게 되었으니 패배는 자초한 셈입니다. 활과 갑옷을 길에 가득 내버림으로써 심지어 적을 돕게까지 되었으니 이런 통곡할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초반의 강세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함으로써 그 후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이 때의 총지휘자 양호(楊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명나라 황제에 의해 소환되어 중죄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그 후유증이 대단히 큰 울산성 전투였습니다.

그 후 가토 기요마사는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울산성 전투의 경험을 살려 군량과 식수 확보에 힘을 기울여 성 안에 샘을 120개나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독안의 든 쥐를 놓친 격인 울산성 전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날씨가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을 감안 하더라도 성 안에서 끈질기게 농성하고 있는 왜군들과 외부에서 구원병력을 이끌고 온 왜장들을 일거에 격퇴하지 못한 작전이 못내 아쉽습니다.  

선조실록에 나와있는 자료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오나 조.명 연합군의 합심 단결된 작전이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소통과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는 21세기에는 더욱 더 필요한 리더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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