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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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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1637년 정축 1월 30일)
삼전도에서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다. 임금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리다 해질
무렵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다.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백관들이 앞 다투어 어의(御衣)를 잡아
당기며 배에 오르다. 사로잡힌 부녀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며 울부짖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 창경궁 양화당으로 들어가다.
- 김훈의 남한산성 [인조실록 요약본] - 에서 발췌
어제 남한산성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이순신포럼 제11회
불우이웃돕기 자선산행이었으며 병자호란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지금의 우리를 반성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의 남문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으며 지화문이라는 현판이 남아있는
유일한 문으로 남한산성의 정문 입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좁은 서문으로
나갔는데 임금이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한 것 입니다.
남염의(濫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뒤따랐습니다.
삼전도비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라고 하니
청나라 입장에서야 전승비가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치욕적인
사실(史實)이 주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어서는 않되겠습니다.
조선이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위기 때마다 리더들의 판단착오와
현장의 책임을 지지 않은 병폐는 상대의 힘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인 우월성만 강조하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를 하기 위한 전략을 세울 때 백성들의
안위까지 고려하고 부하장령들의 희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셨는데, 그 당시의 인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것과 서인이 정권을 독차지 하는
이념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니 국익을 위한 전략과 전술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엄중하기만 한 국제정세를 잘
읽고 있습니까?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경제전쟁의 현실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까? 어떤 변화가 어떻게 몰려오고 있는지
현장을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병자호란 때처럼 정신적인 이념과 갈등에
매달려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행보를 눈여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야말로 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도전하고 혁신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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