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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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노마료(奴馬料)를 받았다.
1597년 6월 9일(戊辰). 궂은비가 내렸다.
늦게 정상명(鄭翔溟)을 원수의 처소로 보내어
문안인사를 드리게 하였다. 처음으로 노마료
(奴馬料)를 받았다. 이날은 여필(汝弼)의 생일인데,
혼자 진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노마료(奴馬料)는 종과 말을 거두는데 드는 비용을
말합니다. 백의종군은 죄를 지은 무장에게 가했던
형벌의 일종으로 파면 다음으로 가벼운 처벌로서
지금의 보직해임 같은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백의종군 중에도 자신의 종을 거느릴 수
있고, 급료도 받았으며 이순신이 묵는 곳에 관리
들이 와서 현안을 보고 하기도 합니다. 백의종군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 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생에 두 번의 백의종군을 했습니다.
1차는 1587년 함경도 조산보만호로 있을 때 북방
오랑캐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한 지휘관의 책임을
물었고 2차는 정유재란을 막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었습니다.
무장으로서 군복이 아닌 "백의"를 입고 업무를
보게 한 것 자체가 징계를 받았다는 효과가 있는
처벌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 4월1일 "옥문을
나왔다" 에서부터 시작되는 백의종군 길은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 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6월 8일 처음으로 도원수 권율을 만났으며 군사
자문 역활과 둔전경영을 위임받아 수행하였으며
조선수군의 상황을 점검하는 일들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인내와 자기희생으로 견디어 내었습니다.
백의종군 중에 어머니를 여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길을 떠난 장군의 마음은 지금까지
충과 효를 원칙으로 지켜온 자신의 신조가 무너지는
아픔을 이겨내었고 칠천량해전으로 흩어진 조선
수군을 다시 불러모아 불굴의 정신력으로 명량대첩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뉴노멀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우리도 지금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성과들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 번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심신의 건강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열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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