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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0-08-17
16,734
700의총 순의비 비문.....
1603년 4월
조헌의 수하 의병들이 직접 비문 작성
순찰사 윤국형(윤선각의 아명)이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조헌 선생의 부하로 들어가서
활약하는 자는 그들의 부모, 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조헌 선생의 군대(의병)에게는
조금도 지원을 못하게 하였다. 충청도 순찰사
였던 윤선각은 의병의 전공을 시기하며 방해
하여 의병들이 모두 해산 당하였다. 조헌은
남은 700명으로 금산에서 싸우다 모두 전사
하였다.
- 윤인식 글 [역사추적 임진왜란] - 에서 발췌
청주성 탈환의 공로로 의병장 조헌은 종4품
봉상시첨정, 승병장 영규대사는 당상관의
벼슬과 단의(옷)가 내려졌으나, 받기도 전에
8월 18일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당시 관군과 의병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선조수정실록을 보며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왜적들이 쳐들어와서 무인지경으로 북상하는
그들을 물리치려면 서로 힘을 합하여 연합작전을
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조선시대
국방의 시스템이나 승려나 의병들을 무시하는
선입견 등은 전쟁이 나도 백성들이 죽어 나가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청주성을 잃고 연기에 진을 치고 있던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㓇)은 의병과 승병의 도움으로
청주성을 탈환하였는데, 창고에 곡식이 그대로
있음을 알고는 의병들이 군량으로 쓰지 못하게
모두 불태웠다고 하니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순의비 비문에 새겨 넣었겠습니까?
전투 당일인 18일에 권율 장군과 합세하여
금산성에서 적을 협공 하기로 하였으나 기일을
늦추자는 권율장군의 편지를 받지 못하고 의병
부대는 금산 연건평 전투에서 결전을 치르고
모두 순절 하셨습니다.
왜군 6번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권율 장군
에게 이치 싸움에서 1차 패한 후 금산성에
머무르며 호남진출을 노렸는데 이를 수적으로
열세인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가 막아
내었습니다.
의기와 혈기만을 앞세운 의병장 조헌 선생이나
의리 때문에 자기의 주장을 확실하게 피력하지
못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전투 장면이 이순신
장군의 전투 장면과 겹쳐지면서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현장을 꿰뚤어보는 원칙과 부하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순신 장군
이었다면 때와 장소와 전법을 잘 조절하여
승리로 이끌어 가시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
했습니다.
비록 지금의 우리가 의병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정성은 통한다고 코로나19, 홍수, 폭염 등
국가 비상사태의 처리 능력도 서로 상대방의
안위와 따뜻한 배려에 따라 해결의 속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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