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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한산대첩 코스1 (칠천량해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5-21

조회 3,313



칠천량해전.jpg
칠천량해전 (漆川梁海戰)

1597년(선조 30) 7월 15일 거제도 칠천량 해협에서
벌어진 해전.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 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
(權慄)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多大浦)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生浦)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加德島)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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