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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차 벽파진, 용장산성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12-10

조회 16,121

[명량대첩 진도/고하도] 47-2차 이순신파워리더십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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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진도군향토문화유산 제5호)

정유재란(1597년) 당시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결파한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진도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이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비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새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초 7일 적선 18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6일에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보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싶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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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항몽유적지 용장산성 (국가지정 사적 제126호)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8, 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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