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열 전장관 임진란 왜장의 후예
왜장 사야가(沙也哥)
- 고 김치열 전 장관의 부음을 접하고 -
오늘 아침 신문 부고란에 김치열 전 법무, 내무장관의 별세를 알리는 짧은 기사가 있다. 어찌보면 고인, 아니 고인의 가문은 이 땅에서 보기 드물게 드라마틱한 삶을 안고 있는 집안이다. 그는 김해 김씨 사람이다. 기존에 있는 김해 김씨가 아니라 임진왜란을 치른 조선 왕 선조가 성을 하사했다고 하여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한다. 성을 받은 사람은 김충선, 다른 이름은 사야가(沙也哥)다.
동래성으로 입성한 일본의 장군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에 발을 디뎠다가 하룻만에 ‘명분 없는 참전 불가’를 외치고 항복한 인물이다. 김치열은 사야가의 12대손이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왜장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군졸 삼천과 함께 동래성으로 상륙. 그리고 다음날로 조선에 투항.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 했다. 그리고 곧장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전쟁에 참가. 조선 왕실에서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과 이름을 내림.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음. 주요 후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
대구에서 남쪽 달성군 가창면으로 가는 911번 도로. 경북 시민들이 즐겨 찾는 주말 휴양지로 가는 길이다. 수성못 오거리를 지나 달성군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자연공원이 있다. 팔조령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시원해 냉천자연원이라 부른다. 선조가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라는 성명을 내려준 사야가 장군 집성촌은 냉천에서 8km 들어간 우록동(友鹿洞)에 있다.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셨다.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는 성리학적인 질서를 흠모하며 지었다. 조선에게는 대충신이요, 일본에게는 천하 반역자일게요.” 14세손 김재석(69)의 말이다. 투항한 사야가는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전했다.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김충선의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따르면 그는 “걸음이 나는 듯하고 수염이 멋있고 키크고 활동적”이었다. 그리고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전부다. 그가 일본에서 나올 때 갖고 있던 호적에는 아버지가 益(익), 조부가 沃國(옥국), 증조부가 鋈(옥)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8형제의 막내요, 부인 2명을 두고 왔다고만 말했을 뿐, 가문 내력은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일본쪽에도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천하의 반역자,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았을 것이다.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천하의 매국노’가 그곳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한다.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사야가의 일본 후손을 찾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아직 확실한 소식은 없다. “찾았다”는 소식에 후손들이 직접 일본을 찾아갔지만 증거가 없다. 그렇게 일본의 흔적은 하얗게 사라졌다.
사라진 인물, 사야가.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배여 있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술회가·述懷歌)”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南風有感)…. ”
그래서 슬프다. 그같은 설움 탓에 오히려 후손에게 더더욱 고향 이야기를 삼가지 않았을까. 장남 경원(敬元)은 아버지 행장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지으셨다”고 적었다.
또 “형제 8인중 가장 끝이라 남들이 형제가 많음을 보면 눈물을 흘려 부러워하셨다”고 했다. 김충선이 되고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떨치지 못한 그는 술회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국가에 불충(不忠)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하나뿐인가 하노라”
후손들에게는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내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뒷산에 있는 장군 묘에는 무덤이 3기 있다. 하나는 장군, 하나는 그 부인. 오른쪽 끝 무덤은 뭔지 모른다. “분명 유품이 함께 부장돼 있으리라 싶은데 시조 묘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아직 50세대가 살고 있는 우록동에 올초 17대손 아기도 태어났다. 일본인의 후손? 아니다. “어릴 때 친구들이 ‘쪽발이’ 욕을 하다가도 나를 보곤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 그냥 하라고 하곤 했다.”
“일제 때 총독부 관리들이 탐문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반역자의 후손이라고 채근하더라. 큰 불이익은 없었다.” 해마다 1000여 명씩 찾아오는 일본 방문객들이 단골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때문에 대대로 칭찬받고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 분 아니었으면 나라 없어졌을지도 모르잖는가,라고.” 세상, 어지럽고 복잡하고 갈등과 분열 가득한 세상. 400년 전 한 젊은이가 걸어간 길을 되짚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