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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평가된 임진왜란 참전 장군 진린(陳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7-21

조회 19,844


广东翁源县今周陂田村璘少怀大志身材魁梧交多与谈剑术讲韬得其秘家民族外患之从军报国明嘉靖四十一年1562),潮州江等地区数万人起事中大震督下令熟兵法者爵万军门督大为赏识署把总军衔遴领兵前往平息嘉靖末年升挥佥平息英德起事因功进广东此后在镇压农民起中再立初年高要及山人月泉等起事璘奉命署都指挥佥佥书广东都司平息高要朱良击将军任高州参将广东总督凌云翼为铲除地方割据力而大征今云浮郁南等地),信宜东进璘破占山王的苗瑶军90兵兼署参将璘把家至云浮定居在六都璘定居后精心规划建房宇分田戌兵城建初具正如史山城如行者歌居者缙绅大夫西上下而夜

二十五年鲜战事再起朝廷知璘有善用兵又熟悉倭情璘于万二十六年1598广兵五千援朝鲜平倭明年二月升任御倭兵官提督水与麻贵、刘綎并将役中将陈蚕、邓子龙击马季全良等将领率水1.3万人500往朝的忠庆尚等海口倭寇发现璘的船后慌作一不久日本主政者丰臣秀吉死去倭寇动荡察后与邓龙与将李舜臣率兵进击李舜臣不幸相继牺此役倭船被焚溺死者以万此同綎部勇攻占行直入天大城看准夹击泗川之敌闻讯来两军于露梁海军岛津义弘歼敌万余人这时刘綎猛攻天城璘回师从海上配合焚倭船百余倭首岛津义弘率兵向西增援璘待岛津义弘船行至半海中将岛津义弘夹击并歼其水300多人倭寇皇退守不久倭寇于乙山中乙山崖深道望而生畏遴亲率兵星夜入乙山其岩洞齐发山谷震倭寇急奔后山士殊死攻倭寇慌忙逃追不舍犯的倭寇一璘的鬓发由黑全然鲜国王李公时说大人鬓发尽形容尽变日接必用功之故援朝抗倭功行綎次之又次之璘升都督同知挥佥



진린(陳璘)
그는 광동 옹원현 용전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비상하였다, 몸이 장대하고 체력이 뛰어나며 그는 많은 지식인들과 검술과 용병술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하고 군대를 잘 이끌었다. 당시 나라가 민족간의 내란으로 골치가 아팠을 때, 진린은 종군을 하여 나라에 이바지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명 가정(세종) 41년(1562년), 조주(潮州) 연강(連江)등에서 수만 명이 무장 투쟁을 일으켰을 때, 총독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어 무장 투쟁을 제압을 하였다. 이때, 진린의 뛰어난 계책으로 총독이 그의 계책을 높이 평가하며,  진린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가정(세종)말년에는 진린은 모든 일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진린은  영덕(英德)사건이 일어났을 때 광동지역을 견고히 수비를 하여 영덕사건을 진압할 수 있었다.그 후 농민반란이 일어날 때 마다 매번 진압에 성공한다, 만력(신종)초,  고요(高要), 게양(揭阳)과 은사 종월천(钟月泉)등 무장 투쟁이 일어났을 때 진린이 나서 토벌을 통해 평정하며 승리를 얻었다, 그는 고요(高要)의 주양보(朱良宝)을 진압하여, 조경(肇庆)유격장군으로 하사받고, 그 후 그는 고주참장(高州參將)으로 역임되었다. 광동의 총독 릉운익(凌云翼)이 지방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라방(羅旁)정벌으 할 때, 진린은 신의(信宜)의 동쪽으로 군을 이끌어 진린은 몽몐족 90부대를 물리치고 그것의 대한 보상으로 동안참장(東安參將)의 부총독으로 임명받았다. 그 후, 그는 운부(云浮)로 이사가 육도향(六都乡)에 거주한다. 그는 운부(云浮)에서 열심히 집을 짓고 군을 훈련시켜 몇 년 후, 그는 현(县)에 작은 규모의 성을 건설하게되었다. 사서(史書)에는 “성이 마치 그림 같으며 행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민들은 근심이 없고 벼슬아치 덕분에 행복하게 사네”라고 기재된다.


만력(신종)25년, 조선전쟁(정유재란)은 다시 시작된다, 조정은 뛰어난 책략을 가지며 병사를 잘 지휘하고 왜의 실상에 대해 능숙한 진린(陳璘)에게 만력(신종)26년(1598년)때 5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조선으로 원군 파병을 하라고 지시한다. 다음해 2월, 그는 제독 수군으로 승진하고, 마귀(麻貴)와 유정(劉綎)과 함께했다. 동남전역 중, 진린(陳璘)은 부장 진잠(陳蝅), 등자룡(邓子龍), 유격 마문환(馬文煥), 계전(季全), 장량(張良) 등 13000여명의 수군과 500척의 전함을 통솔했다. 그는 조선의 충청, 전라, 경상 등 해상으로 정찰을 가면 왜구들은 진린(陳璘)의 전함을 보고 놀라 도망갔다. 그리고 일본의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진린(陳璘)은 왜군이 혼란에 빠질 것을 노려 즉시 등자룡(邓子龍)과 이순신을 노량으로 이끌어 적진에 침공하였다. 왜군은 무방비 상태에 공격을 받아 왜함은 불에 타고 익사자도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정(劉綎)부대는 허점을 노려 순천왜성으로 맹공하며 양쪽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천에서 조명(朝明)연합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에 나서지만 요시히로(岛津义弘)부대는 이미 수만 명의 왜군이 죽는 아주 큰 타격을 입었다. 진린(陳璘)은 유정(劉綎)에게 순천왜성을 공격하라고 지시를 하고 진린(陳璘)은 노량으로 돌아가 서쪽에서 오는 왜군의 지원병의 수로를 막고 수군 300여명과 전함 백여 척을 격파한다. 왜군은 전세가 불리하자 금산으로 도망가 산골이 깊고 험준한 을산(乙山)에 매복을 한다. 새벽녘 진린(陳璘)은 일본군이 잠복한 동굴을 포위하여 산골이 흔들 정도로 화포로 쏴대며 도망가는 일본군들을 끝까지 달려가 죽인다. 이 전쟁에 등자룡(邓子龍)과 이순신은 아쉽게 전쟁 중 전사한다. 전쟁이 끝나고 검은 머리였던 진린(陳璘)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하고. 조선국왕 이공은 진린(陳璘)을 보고:”대인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한 것을 보아 전쟁으로 인해 많은 골머리를 앓았군요.”라고 놀라 말한다. 조선을 도와 왜를 저항한 명나라의 공은 매우 뛰어났다. 전쟁 후, 진린(陳璘), 유정(劉綎), 마귀(馬貴)는 상을 받고 진린은 세음총지휘관(世荫指挥佥事)으로 승진한다. 


-중국유학생 이우성 번역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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