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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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陈璘
广东翁源县龙田铺(今周陂龙田村)人。璘少怀大志,身材魁梧,膂力过人,结交多贤豪,相与谈剑术,讲韬略,尽得其秘,善将兵。在国家民族内外患之际,璘决心从军报国。明嘉靖四十一年(1562),潮州、连江等地区数万人起事,粤中大震,总督下令熟兵法者爵万户。此时,璘献策军门,总督大为赏识,即署把总军衔,命遴领兵前往平息,嘉靖末年升为指挥佥事。平息英德起事,因功进广东守备。此后在镇压农民起义中再立战功,万历初年,高要、揭阳及山人钟月泉等起事,璘奉命领兵讨平,进署都指挥佥事,佥书广东都司,平息高要朱良宝,封为肇庆游击将军,后历任高州参将。广东总督凌云翼为铲除地方割据势力而大征罗旁时(今云浮、罗定、郁南等地),璘领兵从信宜东进。在罗旁战役中,璘破占山为王的苗瑶军90支,诏封为副总兵兼署东安参将。从此,陈璘把家迁至云浮,定居在六都乡。璘定居后,即精心规划,营建房宇,分田戌兵。几年间,县城建设初具规模,正如史书所载:“山城如画,行者歌,居者宁,缙绅大夫东西上下,而夜拆不击。”
万历二十五年,朝鲜战事再起,朝廷知璘有谋略,善用兵,又熟悉倭情,陈璘于万历二十六年(1598年)率广东兵五千援朝鲜平倭。明年二月,升任御倭总兵官,提督水军,与麻贵、刘綎并将。在东南战役中,璘辖副将陈蚕、邓子龙、游击马文焕、季全、张良等将领,统率水军1.3万人,战船500余艘,开往朝鲜的忠清、全罗、庆尚等海口。倭寇发现璘的战船后,慌作一团。不久,日本主政者丰臣秀吉死去,倭寇军心动荡。璘觉察后,即与邓子龙与朝鲜名将李舜臣率兵进击。邓子龙、李舜臣不幸相继牺牲。此役,倭船被焚,溺死者数以万计。与此同时,刘綎部奋勇攻占行长,直入顺天大城,遴看准时机,两面夹击,泗川之敌闻讯来援,两军大战于露梁海,重创日军岛津义弘部,歼敌万余人,这时刘綎猛攻顺天城,陈璘回师从海上配合,焚倭船百余艘。倭首岛津义弘率兵向西增援,璘待岛津义弘战船行驶至半海中,即将岛津义弘夹击,并歼其水军300多人。倭寇仓皇退守锦山。不久,倭寇偷渡潜伏于乙山中。乙山崖深道险,将士们望而生畏。遴亲率兵星夜潜入乙山,包围其岩洞。拂晓,炮火齐发,山谷震荡,倭寇急奔后山,凭高顽抗,遴率将士殊死攻击,倭寇慌忙逃窜,璘穷追不舍,把来犯的倭寇一举全歼。战后,璘的鬓发由黑全然变白。朝鲜国王李公见璘时说:“大人鬓发尽皓,形容尽变,殊异于曩日接见之时,必用虑于战功之故。”援朝抗倭,战果辉煌。战后论功行赏,璘为首,綎次之,贵又次之。璘升为都督同知,世荫指挥佥事。
진린(陳璘)
그는 광동 옹원현 용전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비상하였다, 몸이 장대하고 체력이 뛰어나며 그는 많은 지식인들과 검술과 용병술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하고 군대를 잘 이끌었다. 당시 나라가 민족간의 내란으로 골치가 아팠을 때, 진린은 종군을 하여 나라에 이바지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명 가정(세종) 41년(1562년), 조주(潮州) 연강(連江)등에서 수만 명이 무장 투쟁을 일으켰을 때, 총독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어 무장 투쟁을 제압을 하였다. 이때, 진린의 뛰어난 계책으로 총독이 그의 계책을 높이 평가하며, 진린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가정(세종)말년에는 진린은 모든 일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진린은 영덕(英德)사건이 일어났을 때 광동지역을 견고히 수비를 하여 영덕사건을 진압할 수 있었다.그 후 농민반란이 일어날 때 마다 매번 진압에 성공한다, 만력(신종)초, 고요(高要), 게양(揭阳)과 은사 종월천(钟月泉)등 무장 투쟁이 일어났을 때 진린이 나서 토벌을 통해 평정하며 승리를 얻었다, 그는 고요(高要)의 주양보(朱良宝)을 진압하여, 조경(肇庆)유격장군으로 하사받고, 그 후 그는 고주참장(高州參將)으로 역임되었다. 광동의 총독 릉운익(凌云翼)이 지방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라방(羅旁)정벌으 할 때, 진린은 신의(信宜)의 동쪽으로 군을 이끌어 진린은 몽몐족 90부대를 물리치고 그것의 대한 보상으로 동안참장(東安參將)의 부총독으로 임명받았다. 그 후, 그는 운부(云浮)로 이사가 육도향(六都乡)에 거주한다. 그는 운부(云浮)에서 열심히 집을 짓고 군을 훈련시켜 몇 년 후, 그는 현(县)에 작은 규모의 성을 건설하게되었다. 사서(史書)에는 “성이 마치 그림 같으며 행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민들은 근심이 없고 벼슬아치 덕분에 행복하게 사네”라고 기재된다.
만력(신종)25년, 조선전쟁(정유재란)은 다시 시작된다, 조정은 뛰어난 책략을 가지며 병사를 잘 지휘하고 왜의 실상에 대해 능숙한 진린(陳璘)에게 만력(신종)26년(1598년)때 5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조선으로 원군 파병을 하라고 지시한다. 다음해 2월, 그는 제독 수군으로 승진하고, 마귀(麻貴)와 유정(劉綎)과 함께했다. 동남전역 중, 진린(陳璘)은 부장 진잠(陳蝅), 등자룡(邓子龍), 유격 마문환(馬文煥), 계전(季全), 장량(張良) 등 13000여명의 수군과 500척의 전함을 통솔했다. 그는 조선의 충청, 전라, 경상 등 해상으로 정찰을 가면 왜구들은 진린(陳璘)의 전함을 보고 놀라 도망갔다. 그리고 일본의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진린(陳璘)은 왜군이 혼란에 빠질 것을 노려 즉시 등자룡(邓子龍)과 이순신을 노량으로 이끌어 적진에 침공하였다. 왜군은 무방비 상태에 공격을 받아 왜함은 불에 타고 익사자도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정(劉綎)부대는 허점을 노려 순천왜성으로 맹공하며 양쪽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천에서 조명(朝明)연합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에 나서지만 요시히로(岛津义弘)부대는 이미 수만 명의 왜군이 죽는 아주 큰 타격을 입었다. 진린(陳璘)은 유정(劉綎)에게 순천왜성을 공격하라고 지시를 하고 진린(陳璘)은 노량으로 돌아가 서쪽에서 오는 왜군의 지원병의 수로를 막고 수군 300여명과 전함 백여 척을 격파한다. 왜군은 전세가 불리하자 금산으로 도망가 산골이 깊고 험준한 을산(乙山)에 매복을 한다. 새벽녘 진린(陳璘)은 일본군이 잠복한 동굴을 포위하여 산골이 흔들 정도로 화포로 쏴대며 도망가는 일본군들을 끝까지 달려가 죽인다. 이 전쟁에 등자룡(邓子龍)과 이순신은 아쉽게 전쟁 중 전사한다. 전쟁이 끝나고 검은 머리였던 진린(陳璘)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하고. 조선국왕 이공은 진린(陳璘)을 보고:”대인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한 것을 보아 전쟁으로 인해 많은 골머리를 앓았군요.”라고 놀라 말한다. 조선을 도와 왜를 저항한 명나라의 공은 매우 뛰어났다. 전쟁 후, 진린(陳璘), 유정(劉綎), 마귀(馬貴)는 상을 받고 진린은 세음총지휘관(世荫指挥佥事)으로 승진한다.
-중국유학생 이우성 번역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