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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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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영화 ’명량’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난중일기’ 외에 이 시기를 돌아본 중요한 문헌 중 하나는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懲毖)’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그것을 징계해서 훗날 환난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왔다.
징비록은 7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기록하면서 무자비한 일본의 만행을 성토하는 한편, 그런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지적한다.
유성룡은 당시 영의정이면서 전쟁을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을 알아보고 정읍현감이란 미관말직에서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게 유성룡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주자학뿐 아니라 양명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병학, 의학에도 해박했다.
임진왜란은 명칭 자체가 일본 침략에 대해 반성하라는 적개심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일본 교과서는 이를 ’분로쿠 게이초 시대 전쟁(文祿慶長の役)’으로 쓴다. 분로쿠 게이초는 1592~1614년을 가리키는 일본 천황 연호. 그냥 그 시대 벌어졌던 전쟁이란 얘기다. 그나마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다음부터 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삼한정벌(三韓征伐)’로 불렀다. 그런데 조선을 차지하고 난 뒤 자기 땅을 자기가 정벌한다는 게 앞뒤가 안 맞으니 바꾼 것이다. 중국은 그럼 어떻게 부르나. ’항왜원조(抗倭援朝)’다. 철저하게 시혜자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들은 6·25 전쟁 역시 ’항미(抗美)원조’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전 유럽 해상권을 지배하던 포르투갈 선박이 마카오로 가려다 표류해 일본 규슈까지 온 적이 있다. 이때 핀투라는 상인이 서양식 소총 하나를 선물해주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자기식으로 변형해 재창조하는 데 탁월하기 때문에 이를 조총(鳥銃)으로 개조해 대량 생산 체제까지 갖추는 데 성공했다.
1587년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을 내 앞에 무릎 꿇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신무기 조총과 100년가량 내전을 겪으며 쌓은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무장한 채 쳐들어왔다.
반면 조선은 반세기 가까이 훈구파와 사림파 간 무한 대립에 시달리면서 국력을 기르지 못했다. 명종 때 외척인 윤원형은 수락산을 통째로 사유화하고, 지나는 백성에게 통행세를 받아 축재했다. 조선은 이때가 역사적으로 보면 ’중쇠기(中衰期)’였다. 더구나 일본을 ’동해 끝에 있는 군더더기’ ’개돼지의 나라’로 간주했기에 이런 준동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1995년 장쩌민 주석이 방한했을 때 일본 역사 망언에 대해 공동 대처하자고 했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한 술 더 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자"고 하는 바람에 통역사가 당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2년 뒤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을 때 들어온 외채 중 일본 은행이 꿔준 게 가장 많았다.
한명기 /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