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 73-1차 - 중소기업융합서울연합회 합동교류회를 마치고...
이순신포럼 회원님들께!
봄비가 내립니다. 남쪽에는 호우주의보까지 내렸다는데
서울은 봄비가 아니라 꽃비인 것 같습니다. 이순신 제독께서도
난중일기에 꽃비를 맞으며 돌아갔다 하고 적었답니다.
우리들은 지난 주일 명보극장 앞에서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순국의 바다, 남해를 향해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가시는
회원님들도 계시므로 왜 명보극장앞에서 출발 하는지를 설명
하였지요.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탄생지로서 지금의 을지로 3가역
부근 입니다. 유성룡 대감도 살았고 원균도 그리고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형 허성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고 해요.
"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는데 청녕공주댁 뒤부터 본방교까지
겨우 34집으로 조선 이래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다.........
근세 인물로는 유성룡, 나의 형(허성), 이순신, 원균 등이 일시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예전에는 걸어갔을 백의종군 길을 지금은 버스를 타고 갑니다.
버스안에서 백의종군 길을 설명 하면서 노량해전의 특강이 진행
되었습니다.
마침 광양에서는 매화축제도 열리고 있어 남해로 들어가기 전에
청매실 농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매화가 만개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벌써 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화에
취하여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느라 길을 걸을 수도 없고 감상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봄나물은 우리를 반기면서 저를 사주세요. 하고 파릇파릇한
이파리를 하늘거렸습니다. 곰취랑 취나물이랑 쑥이랑 조금 샀습니다.
허리굽은 할머니께서 깨끗이 손질한 봄나물은 어머니의 향기도 함께
주셨습니다.
점심은 섬진강의 재첩회 비빔밥으로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지방의 별미로서 모두 만족해 하시는 얼굴보고 저 또한 만족
했습니다. 섬진강 저쪽은 경상도이고 이쪽은 전라도 이고....
화개장터가 바로 눈앞에 있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왜적의 칼날
앞에 7년동안이나 무너졌으니....
남해까지 오면서 노량해전의 역사적 의의와 설명을 듣고 DVD도
시청하면서 왔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현장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고, 명나라 수군은 왼쪽,
조선수군은 오른쪽, 그리고 왜적인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는 사천쪽에서
이리로 오고.... 하는 설명에 다시 재현되는 그 날의 노량해전을 보듯이
숙연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남해 충렬사는 남해대교를 건너자마자 있으며 이순신 제독을 기리는
사당으로 1663년(현종 4)에 충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후원에는 이순신 제독의 유규가 처음으로 육지로 올라와
모셔졌던 가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충렬사에서 참배를 하고 이름모를
조선수군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며 깊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노량포구 앞에는 거북선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서 실제 모습의 거북선을
보며 설명도 듣고, 420여년전의 선조들의 지혜에 감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락사, 첨망대 등 이순신 영상관도 둘러보고 이순신
제독의 순국의 바다 관음포 앞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해가 막 떠오르는 9시경쯤 되었다고 하니 큰 아들을
비롯하여 주위에서 모시던 이들을 얼마나 황망했겠습니까? 이순신 제독의
유언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마라." 이 한마디로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셨는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진정코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세지 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저녁은 앵강만의 호수같은 아름다운 원천 포구에서 생선회로 시작
하였습니다. 자연산으로 주문을 해서 그런지 회가 쫄깃한 것이 너무
맛있었습니다. 아침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이곳 남쪽 끝 남해까지 온
피곤함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활기찬 저녁식사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ㅎㅎ
중소기업융합연합회는 업종이 다른 중소기업들이 모여서 서로 경영정보를
나누고 기술혁신을 위한 융합과 교류를 통하여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을
목표로 서울 중소기업진흥공단을 주관기관으로한 800여개 회사가 모인
중소기업의 이업종 단체 입니다.
이 곳에는 26개의 작은 모임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4개의 모임들이 합동
교류회를 하기로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상호간의 친선교류뿐만 아니라
이순신 제독의 리더십을 배우고 그 분의 군사경영 철학을 나의 회사경영에
접목시켜 멘토로 삼고 오자는 뜻이 있어 이번만큼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남해읍을 지나오면서 남해 유배문학관을 들렀습니다. 예전부터 남해에는
유배객들이 많이 왔는데 그 유명한 사씨남정기의 서포 김만중 선생님이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약천 남구만 선생님 등 비록 유배는 왔지만 주옥같은 글을 남겨 우리나라의
유배문학의 정수를 뿌려놓았습니다.
오랫만에 역사공부와 함께 인문학 공부를 하고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선조들의 지혜와 따듯한 인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숙소는 바로 바닷가에
있었는데 밤늦게 들어 오느라 아름다운 풍광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바닷가에 멀리 보이는 섬이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를 오셔서 돌아가셨다는
노도였습니다. 예전에 노를 많이 만들어서 노도였다는 설도 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앞의 작은 섬은 꼭 거북선 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걸어갔습니다. 가보니 과연 기암 절벽으로 거북선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돌들이 겹겹이 쌓여서 그렇게 보였습니다.
아침은 도다리쑥국으로 준비했습니다. 요즈음 봄철이라 향긋한 쑥도
많고 도다리도 제철이라 그야말로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모두 두그릇씩
비웠답니다.ㅎㅎ
금산 보리암을 올라갔는데 고려시대때부터 사용 되었던 봉수대까지 갔습니다.
산 중턱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걷는 길은 약 1Km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답니다. 남해 금산은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 이라는 시로 유명해졌습니다.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보리암으로 가기 전에 상사바위라는 곳에 가서 좌청룡 우백호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보러 갔습니다. 그 중앙에 보리암의 미륵보살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트레킹만 생각하고 올라갔지만 제법 산행을 하는 모험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점심은 지금 제철인 멸치회로 했습니다. 우리 단체의 회장님 한분이
쏘셨습니다. 멸치조림에 막걸리까지 해서 스폰해 주셨습니다.
점심을 잘 먹고 삼천포 대교를 건너 사천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죽방염의 시설도 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라고 알려진
삼천포대교를 지나 사천의 선진리성으로 갔답니다.
벚꽃이 봉우리를 피워내려고 붉은 빛이 감도는 꽃망울 들을 잔뜩 품고
있었습니다. 선진리성은 왜성으로 임진왜란때 시미즈 요시히로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남은 성터에 복원하여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어깨에 조총을 맞아 크게 고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군관도 총을 맞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적들이 철수
하려고 할때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작전으로 공격할때 사천의 선진리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를 명나라의 동일원 제독과 조선의 정기룡 장군이
힘을 합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불행히도 아군의 참호에서 불이나자 왜적들이 이 틈을 노려 조명 연합군
18,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죽었습니다. 이에 한꺼번에 무덤을
만들고 이를 조명군총으로 하여 지금도 성 옆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름모를 군사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되었으니
그 감사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당에 참배를 하며
묵념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이렇게 합동교류회를 마치며 올라오는 버스안에서 각자의 소감을 발표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순신을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면서 멋진 행사를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이순신, 잘못알고 잇었던 이순신, 나라를 위하는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 배울점이 너무 많은 합동교류회였으며 1박2일
동안 끈끈한 정으로 다시 맺어진 우정을 변치말자며 헤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