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커뮤니티 > 후기게시판
김이수
2017-12-14
20,026
이순신포럼 자선산행 -
남한산성, 12월의 어느 멋진 날에
12월 9일 09시 30분, 남한산성.
바람 자고 햇살 자글거려 안온한 겨울 아침이다.
지화문(至和門, 남문) 성벽은 햇살 가득 안고 눈부신데,
산성의 숲은 눈이 쌓여 하얗고 응달의 성첩길은 얼어서 미끄럽다.
10시 30분, 남장대(터)에 이르러 임진년 정묘년 병자년의 참담한 역사를 듣는다.
서른다섯, 적잖은 일행을 이끈 이부경 이순신포럼 대표는 실록의 기사를 바탕으로,
삼전도 치욕의 배경이 되는 반세기 역사를 조근조근 들려주는데 막힘이 없다.
덧붙이는 일화들은 흥미진진하거니와 눈물겨운 역사의 애처로운 갈피여서 아리다.
어느 곳의 문루에도 하나같이 단청이 화려하다. 이부경 대표는 "단청은 궁궐, 사당,
절집에만 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또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문루를 복원하면서 고증에 소홀한 듯싶다"고 지적했다.
좌익문(左翼門, 동문)을 지나 전승문(全勝門, 북문)에 이르니 정오다. 길게 늘어선
성첩을 따라 익어가는 햇볕이 봄볕인 양 다사롭다. 우린 그 볕에 시린 마음들을
말리며 간식을 나눴다. 그때 헐벗은 성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기약없는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은 몇 끼 만에 받아든 식은 주먹밥 한덩이로 허기를 채우며
언 몸을 이 볕에 녹였을까. 볕만은 그때도 지금처럼 푸짐하여 안온했을 터이다.
동장대(터) 지나 북문 못 미친 성첩에도 암문(暗門)이 있다. 20리에 이르는 성첩에는
16개의 암문이 요처요처에 설치되었다. 그야말로 숨겨진 문으로, 은밀히 해야 하는
모든 군사행동은 이 암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다못해 갖은 핑계로 성을 벗어난
자들도 이 암문을 통해 임금을 버리고 청군 진영으로, 또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쳤다.
13시 30분, 마침내 우익문(右翼門, 서문)에 닿았다. 임금이 앉은 자리에서 바라보아
동문은 왼쪽, 서문은 오른쪽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일정계획대로라면 리더십 특강까지
마치고 식당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각이다. 출발부터 꼬여서 지체된 터였다. 원래 일정으론
남문에서 왼편으로 길을 잡아 수어장대(서장대)와 행궁을 보고, 서문 지나 연주봉 옹성을
조망한 후 북장대(터) 거쳐 북문에서 남문으로 곧장 무질러 내려오는 행로여야 했다.
한번 길을 잘못잡아 일정이 시간 반이나 늘어져 된통 꼬이고 만 것이다.
서문은 이른바 "치욕의 문"이다. 어의를 벗고 수의(囚衣) 같은 청의로 갈아입은 인조는
이 문을 나서자마자 말에서 내려 삼전도로 걸어가 홍타이지 앞에 꿇어 엎드려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를 행함으로써 47일간의 감금에서 풀려났지만 이후 조선 백성은 더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는데 한 번의 절마다 세 번씩 모두
아홉 차례 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려(叩頭) 절하는, 신하가 황제를 알현하여 올리는
청조(淸朝)의 배례를 말한다. 이때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지만 청국으로 끌려간
수십만 조선 백성들의 갈가리 찢긴 삶과 피눈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조는 휘가 종(倧)으로 선조의 5남 정원군 부(王孚)의 장남이다. 군호는 능양군으로,
아우 능창군의 죽음을 당해 울며 한을 품었다. 광해군 치세에서 정인홍과 이이첨 등을
정점으로 집권세력을 이룬 대북파는 도적의 무리를 잡아 징치한 칠서(일곱 서자)의
옥을 이용, 역모를 조작하여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사사했으며, 서인과
남인 세력을 궤멸시켰다. 계축옥사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안보를 위해 조작을 일삼는
건 변함이 없다. 이에 극도의 위기감과 반감을 품고 반정을 주도한 김류, 이귀, 이서 등
서인 무리가 1623년 인목대비의 추인을 받아 능양군 종을 옹립하니 조선 16대 임금 인조다.
인조는 즉위 이듬해 (역모의 무고를 당해 분개한) 이괄이 난을 일으켜 도성으로 쳐들어오자
지체없이 공주로 내빼 목숨을 부지했다. 난을 가까스로 평정한 서인 정권은 더욱 난폭한
공포정치로 환란의 싹을 키웠다. 서인 무리는 뼛속까지 중화사상에 물든 자들로, 시세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친명배금정책으로 정묘호란을 불렀다.
사실 이전까지 명나라의 우산 아래에서 (왜구의 국부적인 침탈 외에는) 줄곧 평화로웠던
조선은 성종 이후 사실상 비무장 국가였다. 최소한이나마 편제된 군사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실제로는 빈 껍데기였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군기(軍器)와
병력을 점고한 기록이 그런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명색이 조선의 대장군이라는 신립이
방편을 다해 긁어모은 최후의 관군이 오합지졸 팔천에 불과하거늘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묘호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임금과 서인 정권은 근거 없는 허세만 부리다가
다시 외침을 당해 지리멸렬한 채 허둥지둥 강화도로 내빼려다가 전광석화로 짓쳐내려온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 좁은 독안에 스스로 갇히고 말았다. 독안에 든 쥐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든 남한산성이든 그 좁은 외통수 독안으로 기어들어가
대체 뭘 하려 한 걸까? 사직의 보존? 존화사대의 의리? 구실은 그럴싸하지만 실은 다 제 목숨,
제 자리 보전하려는 필부(匹夫)의 몸부림이라고 깎아내려도 뭐랄 수 없는 군색한 처사였다.
적어도 그들의 파천(播遷) 결정에 백성은 없었다. 백성은 사나운 적군의 아가리에 대책 없이
버려진 채 임금은 제 살 길만 궁리한 끝에 하필 제 죽을 길을 찾아들었다. 독안이다.
그들은 사나운 십만 적군에 보쌈당한 그 비참한 독안에서도 허세를 버리지 못했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도 실은 부질없는 말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독안에서는 말의 성찬 말고는
현실을 타개할 방편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방편은 독의 목울대를 움켜쥔 청군에게 있었다.
그래서 결사항전의 허세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도 임금은 내탕고를 탈탈 털어 청군의 장수에게
은밀히 구명의 뇌물을 바쳤다. 임금에게는 그나마 방편이 있었지만 빈 들에 버려진 백성들에게는
아무 방편이 없었다.
온 산하가 쑥대밭이 되고 60만에 이르는 백성이 청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렸다.
그러는 사이 임금과 서인 정권이 한 일은 외란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며 제 목숨
구하느라 옛 동지의 목숨까지도 적군의 문책 아래 가차없이 떠넘겼다. 그러는 와중에
임경업도 김자점의 삿된 칼날에 덧없이 스러졌다. 용렬한 임금 인조는 요망한 후궁
소용 조씨의 치맛폭에 휩싸인 채 제 권력을 간수하느라 종사를 망치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꺾으니 조선의 현실은 갈수록 암담했다.
늦었지만 산성의 제일 높은 곳에 우뚝한 수어장대를 보기로 했다.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삼전들판은 손에 잡힐듯 가까웠다. 온통 아파트 빌딩 숲 가운데 제2롯데월드 타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명색이 대통령이란 자가 제 나라 국방의 안전을 치명적으로
희생시켜가며 사사로이 허가를 내준 "최고 높이의 금자탑"이다. 그는 저 타워를 보며
스스로를 대견해할까.
다시 왔던 길을 더듬어 내려오니 15시다. 이순신포럼에서 마련한 늦은 점심(백숙)을
먹으며 자선 역사 탐방의 의미를 새겼다. 오늘 걷힌 회비는 전액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되고 행사에 따른 비용은 일체 이순신포럼에서 부담했다. 이부경 대표는
체구는 작고 여리했지만 뜻은 이처럼 거인의 풍모가 넘쳤다.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목탁이요 소금이다.
일행 중 최철수 교수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불러 오늘 "12월의 어느 멋진 날"의
끝을 멋지게 장식했다. 우리는 오늘 이처럼 멋지게 배우고 놀았지만 그날의 조선은
지옥이었다.
2017. 12. 09 김이수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