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을 감내하는 이순신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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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파워 리더십 버스를 타고 명량대첩축제를 다녀왓습니다 (풍경아빠(koreantrek)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0-10-14

조회 24,174

이순신 파워 리더십 버스를 타고 진도 해남을 다녀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인 명보아트홀에서 출발해서 버스내에서 해군제독의 강의를 들어면서 명량해전의 실상과 이순신의 리더십를 공부하고 현지에서 전문해설가로부터 그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침 가는 날이 축제일이라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10월 8-10일 사이에 열린 명량대첩축제는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 13척과 민초들이 합심해 왜선 133척을 격파한 대승을 기념하고 명량해전에서 숨진 원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남도와 해남, 진도군이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입니다. 이 행사는 특이하게도 바다와 이 바다를 가르는 다리(진도대교)위에서 주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남해바다에서 서해를 거쳐 서울로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명량(울둘목)에서 벌어진 그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하며 사진을 감상해보세요. 참고로 이곳에서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유명한 문장이 나왔구요, 불멸의 이순신에서 보면 울둘목을 가로지르는 철사슬을 설치하여 적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장면이 나온는데 전문가의 연구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단편적으로 알아온 내용만으로는 그 치열했던 실상과, 승리의 요인을 정확하게 알수 없었던 것을 이번의 기회로 정확하게 알수있는 기회였습니다. 정확한 분석과 준비로 이기는 싸움을 한 이순신의 리더십! 좀 더 깊게 공부해보야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충무공의 활약의 이해를 돕기위해 7년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옮겨왔습니다. 이순신 파워 리더십 버스에서





1592년

4월 12일 거북선 완성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7일 옥포 해전, 합포 해전
- 5월 8일 적진포 해전
- 5월 29일 사천포 해전(거북선 첫 출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 군관 나대용도 부상.
- 6월 2일 당포 해전
-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 6월 7일 율포 해전
-7월 8일 한산도 해전(학익진 사용)
- 7월 10일 안골포 해전
- 8월 29일 장림포 해전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부산포 해전. 녹둔 만호 정운 전사


1593년

- 2월 6일~3월 8일 웅천포 해전
- 5월 일본의 서진을 막기 위해 견내량 봉쇄
-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 8월 10일 정철총통 제조
- 8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10월 9일 임명 교지 받음


1594년

3월 4일 제2차 당항포해전
- 3월 6일 명나라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
-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 10월4일 2차 장문포 해전


1595-1596



1597년

- 1월 14일 약 20만의 일본군이 조선 재침



- 2월26일 서울로 압송
- 3월4일 감옥에 들어감
- 4월1일 감옥에서 나옴. 백의종군(2차)
- 4월13일 모친상을 당함
- 7월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 받음
- 8월28일 어란진 해전
- 9월7일 벽파진 해전
- 9월16일 명량해전
- 10월14일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들음
- 10월29일 고하도에 수군진영 설치



1598년

- 2월17일 고금도로 수군진영 옮김
- 7월16일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 편성
-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 적의 총탄에 맞아 선상에서 전사. 10명의 조선 장수 함께 전사



명량해전 개요

1597년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전투(거제북부)에서 대패하고, 전투 후에 죽었다. 약 160여척에 달했던 조선 함대의 전선은 칠천량전투를 치르면서 거의 모두 격침되었다. 전투 중에 배설장군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장을 빠져나왔다. 칠천량전투에서의 패배 이후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와 수군들을 모아서 남하하였다. 8월 19일에 장군은 배설장군이 이끌고 나왔던 전선들을 회령포에서 인수하였고 군량미, 화살, 활 등을 모았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으로 싸우지 말고 육군으로 싸우라 하였으나, 장군은 그의 유명한 말인,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을 담아 선조에게 보내었다. 이순신 장군은 계속해서 수군의 기지를 서쪽으로 움직여갔다.



9월 16일에 탐망선이 수많은 일본 전선이 수군 본영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오늘날 해남군에 있는 수군 본영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기다렸다. 133척의 일본 전선이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인 울돌목으로 들어왔다. 울돌목의 가장 낮은 수위는 약 1.9m이고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이다. 일본군들은 전선을 분리하여 울돌목으로 들어올 수 없는 아다케선은 앞에서 대기하였다. 133척의 비교적 아다케선보다 적은 전선들만 울돌목을 통과하여 조선함대에 공격을 해왔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배를 일자로 편성하는 일자진을 펴도록 명령하였다. 개전 이후, 다른 장수들이 공격을 머뭇거리고 있자, 이순신 장군의 배가 선두에 서서 공격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전선에게도 공격을 명하고 일본 함대로 돌진하였다. 곧 조류가 바뀌자 남아있던 조선 함대의 전선들도 이순신 장군을 따라 공격하였다. 순식간에 31척의 일본 함선이 파괴되었고 일본군은 해질녘에 퇴각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대응한 덕분에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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