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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해군본부 조함단장 김덕수 제독의 리더십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0-10-18

조회 19,460


'해병대 사병들이 나한테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데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충성을 바치더라고요.'

김덕수 제독은 소령 시절이었던 1978년 5월부터 1년간 서해안에 있는 이작도 기지의 부대장을 지냈다.
해군 장교로 임관한 후 처음 맡은 지휘관이었다. 그 직전엔 진해경비사령부에서 당직사령으로 근무했다.
당직사령은 상황실 장교들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레이더 기지 근무는 함정 근무보다 인기가 없었다. 함정에 비해 제반 근무환경이 열악한 데다 간첩선이
자주 출몰하는 탓에 기지 지휘관은 늘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만약 간첩이 섬을 통과해 육지로
들어간 사실이 드러나면 기지 지휘관은 무조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해군과 기지 외곽을
경계하는 해병의 갈등이 만만찮아 기지 지휘관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리더쉽이 요구되었다.

다른 해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김덕수 소령도 내심 기지로 발령 나지 않기를 바랐다. 더욱이 이작도
기지는 전임 기지장이 부사관의 총기 난동사건으로 직위해제 당한 곳이었다. 김 제독은 이작도 기지로
발령 났을 때의 심정에 대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고 회고했다.

기지장으로 부임한 김 소령이, 해결할 과제1호로 삼은 것은 해군과 해병의 갈등이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선 도저히 부대 분위기를 추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이작도 기지의 전체 병력은 100명
안팎이었는데, 그 중에 해병대 1개 소대(30여 명)가 포함돼 있었다. 이 해병대 병력과 섬에 정박하는
고속정 대원들 간에 싸움이 자주 발생했다.

당시 이작도에는 고속정 1개 편대(3척)가 늘 정박하고 있었다. 고속정의 작전단위는 보통 3개 편대
(9척)로, 2개 편대가 바다에 나가 있으면 1개 편대는 섬에 대기하는 식이었다. 고속정 한 척의
승조원수는 25명 안팎으로, 1개 편대의 고속정 대원은 70~80명선이다.

양측의 충돌은 주로 밤에 빚어졌다. 기지 경계가 주 임무인 해병대는 야간에 배에서 나와 술집을 찾아
다니는 고속정 대원들을 제지했고 고속정 대원들은 이에 반발했다. 충돌은 툭하면 패싸움으로 번졌다.

사실 충돌의 근본 원인은 서로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있었다. 해군은 해병을 자신들의 보조병력쯤으로
여기며 깔봤고, 특유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해병은 해군 상급자에게 경례도 붙이지 않는 등 해군을
무시했다. 심지어 기지장인 김 소령도 부임 초기 이런 수모를 당했다.


"기지장이 새로 부임했는데도 해병대 소대장인 중위가 이틀 동안 얼굴도 안 보이더라구요.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해병대 사병들도 해군한테 절대 경례하지 말라고 단단히 교육을 받아
해군 부사관이나 장교들한테 경례를 안 해요. 해병대를 어떻게 내 품에 안을 것인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고민 끝에 우선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 주고
근무의욕을 고취할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김 소령은 해병대 사병들에게 조(組)를 짜게 했다. 낚시 조, 굴 따는 조, 게 잡는 조, 토끼 잡는 조
따위를 만들어 서로 경쟁을 시켰다. 당시 기지 부식 상태는 고속정 부식에 비해 형평없었다. 사령부로
부터 지원되는 예산 자체가 워낙 적은 탓이었다. 김 소령은 병사들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먹을 것을
많이 구해 오는 조에 대해서는 상륙(외출,외박)횟수를 늘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먹을거리도 늘고 육지로 나가는 기회도 자주 생기니, 병사들 처지에서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였다. 늘 불만에 젖어 있던 해병대원들이 활기를 띠자 자연히 부대 전체 분위기가 좋아졌다.
해군 소령인 기지장에게 충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해군 병사들과의 충돌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일부
해병대 병사는 해군이 맡아온 기지장 당번을 자청하기도 했다. 김 제독은 당시 해병대 사병들의
변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병대 병사들이 나를 따른 까닭은 내가 그들의 처지에서 일을 한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들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맘껏 하도록 활동의 장을 만들어 준게 주효했어요.
'이번 기지장은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준다. 해병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마음을 주니까 마음으로 다가오더라구요."

평소 해병은 해군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해병이 보기엔 산꼭대기에 있는 외곽초소에서 근무하는
거나 바다에서 배를 타는 거나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해군 부식이 훨씬 좋고 수당도 더 받으니
차별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다 해상 출동을 마치고 섬에 들어온 고속정 대원들이 과시라도
하듯 밤에 마을을 쏘다니며 술을 마셔대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 소령은 상대적으로 약자인 해병대 사병들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도록 각별히 배려했다. 해군 고속정
대원들과 싸움이 붙으면, 해병의 과실이 명백한 경우에도 현장에선 대부분 해군을 나무랐다. 그렇지만
돌아와서는 해병을 꾸짖고 달랬다. 김 소령은 이 문제로 심지어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PGM(백구급
초계함으로 통상 초계함으로 불리는 PCC보다 작다)함장에게 대들기도 했다.

기지장이 자신들을 그토록 배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해병은 무슨 일을 시키든 열성을 다했다.
한번은 함대사령관이 각 기지에 돼지를 몇 마리씩 나누어 줬다. 잘 키워서 부식으로 잡아먹으라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해병대에 맡기니 기가 막히게 잘 해냈다. 돼지우리도 얼마나 잘 지었는지 마을
주민들이 구경 와서는 자기들 집보다 더 좋다고 감타한 정도였다. 또 오리도 키우게 하고 날짜를
지정해 토끼나 꿩을 잡아오도록 했다. 이것도 '훈련'이라고 하니 해병대원들은 신이 나서 열심히
키우고 잡았다.

기지 대원들은 고기의 양이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되자 고속정 대원들을 불러다 먹였다. 그러자 고속정
측에서는 답례 표시로 기지용 부식을 건냈다. 또 기지 대원들과 고석정 대원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얻은 돌굴과 배에서 먹는 통조림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양측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이 기지 대원들에게 돌굴을 선물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늘 일거리를 찾는 스타일인
김 소령은 마을 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실천에 옮겼다.
기지 자체 발전기에서 나오는 잉여전력을 마을에 공급해 주고, 도로 청소를 도와주고, 아이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가르치고, 수리나 공사 해줄 것이 있으면 힘닿는 대로 거들어 줬다.

이렇게 하자 해군기지를 대하는 주민들의 눈이 달라졌다. 그저 술먹고 사고나 치고 어업이나 통제하는
'불청객'으로 여겼던 해군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그해 겨울 자발적으로 나서서
기지 대원들의 김장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기지 대원들은 맛있는 김치를 풍족히 먹을 수 있었고,
덤으로 사령부에서 주최한 기지 부식대회에서 1등을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양측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해지자 주민들의 민원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기지가 위치한 해안엔 유난히 돌굴이 많이 났다. 그런데 그 돌굴은 주민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보안상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된 지역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사고가 발생했다. 일부
주민들이 밤에 숨어 들어와 채취를 시도하다가 경비를 서는 해병대원들로부터 간첩으로 오인받아
총격을 받은 것이다.

김 소령은 돌굴 채취를 양성화하기로 맘먹었다. 간조 시간인 오후에 일정 시간을 정해 두고 누구나
따갈수 있도록 했다. 대신 채취한 굴의 일부를 기지에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주민들은 대환영이었고
기지 대원들도 좋아했다. 주민들이 조금씩 주고 간 돌굴은 기지 대원들의 훌륭한 부식이 되었다.
또 앞서 말한 대로 고속정에서 먹는 통조림과 교환되기도 했다.

김 제독이 이작도 기지에서 체험한 리더십의 요체는,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가장 강력한 무기
라는 것, 그리고 지휘관이 부하들 마음을 이해하고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부하들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썽 많던 해병대원들은 해군 소령인 기지장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도움을
주려는 걸 알게 되자 해군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지휘관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것은 곧 부대
단합과 발전으로 이어졌다. 주민들과의 관계도 비슷했다. 군이 먼저 민에 봉사하는 자세를 보이자
민도 군에 마음을 열고 상생의 길로 나아갔다.

"해병대 사병들이 나한테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데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충성을 바치더라고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여니까 되더라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표창까지 받았죠. 미군 헬기가 훈련 중 우리 기지에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해병대가 얼마나 수색작업을 열심히 했는지 모두 구조해 냈어요.
한미연합사에서 고맙다고 감사패를 수여했지요. 단합이 잘되니 이렇게 좋은 일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해병대 덕분에 기피 일번지인 이작도 기지에서 굉장히 즐겁게 임무를 마쳤습니다."

출처: 장군들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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