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DMP 3기 박영하 회장님께서 올리신 글 입니다.
서울대 DMP3기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리더십을 공부하는 테마여행을 계획하여 2007년 봄(4/14 ~ 15일)에 진해해군사관학교와 거제도를 찾은 것을 시작으로, 두번째 진도, 세번째 남해 / 하동 그리고 이번에는 네번째로 순천과 여수를 다녀왔다.
그동안 3차에 걸친 여행은 남도의 수려한 산수山水와 맛 있는 음식을 즐기는 쪽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그동안 느끼고 배웠던 내공이 쌓여 문제의식이 조금 싹을 틔웠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충무공 이순신은 23전 23승했다지만 그것은 전투에서 이긴 것일뿐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도 아니었고 원해서 시작한 전쟁은 더더욱 아니었다. 침략자 왜놈들과 구원 온 청나라 군사들이 한반도를 휘젓고 분탕질을 하고 다닐 때 조선의 조정과 위정자들은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하였던가?
우리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고 무엇을 반성해야 할까?
왜 그런 상황에 처했으며 지금은 어떤가? 많은 질문과 의견의 개진이 있었다.
우리가 발전하고 있고 우리 테마여행이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흐뭇하다.
변정주회장의 리더십 강의도 좋았다. 5가지 요소가 고루 갖춰지고 작동해야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는 요지였다.
첫째가 Leadership for Follower
둘째가 Leadership for Boss
셋째가 Leadership for Associate
넷째가 Leadership for Social
다섯째가 Leadership for Self
그 중에서도 Self Leadership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자승자강自勝者强이라고 하신 옛 선현들의 말씀을 떠올린다.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하여 다음의 일화를 소개한다.
Leadership for Boss 에 관한 것이다.
<朝明 연합함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수로대장水路大將 진린이 조선에 입국한 것은 1598년 6월 중순이었고 이순신의 진영이 있는 고금도 통제영에 합류한 시점은 7월 16일이었다. 진린은 선조의 전송을 받으며 고금도 통제영으로 내려가는 자리에서 ’만약 배신陪臣들 중에 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군율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대쪽같은 성격의 이순신과 포악한 진린의 정면 충돌을 염려한 비변사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제장諸將들에게 미리 진린의 성품을 알려주고 그의 지시를 따를 것과 접대를 잘 해서 환심을 살 것을 신신당부 했다. 이순신은 비변사가 제안했던 사항을 전달받고 거의 그대로 실행했다.
1598년 7월 16일, 이순신은 1만 3,000여 명의 군대와 300여 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진린의 함대가 보이기 시작하자 군대의 의식을 갖추어 멀리까지 나가 영접했다.
그리고 사슴, 맷돼지, 생선을 잡아 성대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진린은 군령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의로 이순신의 해상 작전을 번번이 제지했다.
이순신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량해전 이전의 몇 차례 전투에서 거둔 전공戰功을 진린에게 돌림으로써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진린은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이 조선에서 저지르는 약탈, 강간 등의 범죄행위를 문책할 수 있는 권한까지 넘겨주었다. 또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협의해서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나들이를 나갈 때에도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면서 절대로 앞서 나가지 않았다. 대국의 오만불손한 장군을 감화시킨 이순신의 위대한 인간승리였다.>
- 옮겨 온 글 -
먼저 순천을 들렸다.
순천에서는 향토문화사학자이신 진인호 선생의 해설을 들으며 왜성, 검단산성, 충무사를 답사했다.
왜성倭城은 전라도 지역 성城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서
정유재란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히데이에, 도다카도라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 간 쌓은 토석성土石城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朝 명明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 최대의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왜성 전투는 노량해전의 서전緖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라좌수영에서 벌어졌던 최대의 전투였다. 중국 명나라의 육군 장군 유정과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 6천여 명, 명의 해군 제독 진린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여 명의 병력이 순천 왜성을 비롯하여 장도(노루섬)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퇴하였고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고니시유키나가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이 노량해전에서 전사 하셨다.
검단산성은 여수반도의 길목에 위치해 광양만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지다. 정유재란 때 朝明 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이 산성의 동쪽으로 약 2.7 km 떨어진 왜성의 小西行長과 대치,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 이 전투를 왜성 전투라고 하며 조명일朝明日 삼국의 수륙군이 얽혀 격전을 펼친뒤 노량해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장터였다.
여수에서는 정순아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진남관, 고소대, 충민사등 충무공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진남관은 조선조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本營으로 사용하던 곳에 임진왜란 뒤인 선조 32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객사客舍이다.
건물 높이가 14m, 길이 54.5m, 둘레 2.4m의 큰 기둥이 68개나 서 있는 현존 국내 최대 단층 목조건물이다. 진남관의 이름은 남쪽을 진무鎭撫한다는 의미이다.
여담이지만, 낮에 진남관을 둘러봤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서는
진남관이 음식점 이름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집 사람이었다. (이것은 분명 무식의 소치이리라)
나는 충무공 이순신께서 엄하셨던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꼭 그렇지만 않았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되었다.
고소대를 방문하면서 정순아 문화해설사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전투를 앞두고 한 병사가 도망을 쳤다. 장군은 그 병사를 잡아서 참수를 하고 고소대에 효시를 했다.’일벌백계였다. 이것만 들으면 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곳 고소대에 타루비 墮淚碑 가 있었다.
타루비 墮淚碑는 선조 36년에 이충무공의 막하에 있던 수졸들이 장군의 거룩한 덕을 눈물로 흠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좌수영대첩비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부하 수졸들이 눈물을 흘렸다니.....
장군께서는 부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기록을 많이 하셨는데 간단하고 명료했다. 전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므로서 공로를 인정 받고 상을 받을 수 있게하셨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가 이충무공 慈堂기거지와 선소船所였다.
< 이충무공 慈堂기거지>는 효자이신 이충무공이 자당인 卞氏부인을 여수로 모셔와서 충정공 정대수장군의 집에 5년간 기거케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집터만 남아 있다. 전란 중임에도 어머님을 가까이 모시고 효도를 하셨다니...
선소船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며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 제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이다.
정순아 문화해설사 말로는 이충무공 어머님 계셨던 곳과 선소를 찾는 방문객은 거의 없다면서 이부경사장의 요청이 있어 온 것이라고 했다.
이부경사장은 우리 DMP 3기 이순신제독 리더십연구 테마여행을 기획해서 지금까지 이끌어 온 분이신데 이번에 이것을 사업화하여 <이순신 파워 리더십 버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번 이순신 제독 리더십 연구 테마여행에는 순천이 고향인 김윤중회장이 모처럼 합류를 해서 순천에서 맛 있는 점심도 사고 돌아올 때 여수 갓김치도 한 통씩 선물을 해 주셨다.
순천에서 점심을 먹을 때 곁들인 <뽕>이라는 술이 참 맛 있었다.
오디로 빚은 술이라고 했다. 이충무공께서는 위장병이 있어 평생을 점심을 걸렀음에도 술은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때도 <뽕>술이 있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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