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54자 판소리 '인간 이순신'
3만7554자 판소리로 되살린 ‘인간 이순신’
[중앙일보]입력 2012.09.04 00:24 / 수정 2012.09.04 00:26
이순신가 만든 김영옥씨
지난달 서울 개포동의 스튜디오에서 ‘이순신가’를 녹음 중인 김영옥씨. [김도훈 기자]
“판소리는 자기를 해부하는 소리요. 소리를 내뱉을 때 오장육부가 떨린당께. 슬픈 소리는 간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소리는 배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소리는 가슴에서 나오제.”
판소리꾼 김영옥(65)씨가 3일 국내 최초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집대성한 『이순신가(歌)』(SNS출판)를 펴냈다. 김씨가 8년간 매달린 끝에 완성한 창작 판소리집이다. 자료 수집과 집필에만 6년이 걸렸고, 2년간 단어 하나하나에 음을 붙였다. 3만7554자 분량, 완창에만 4시간이 걸리는 대작이다. 김씨는 “갑옷에 갇혀있는 인간 이순신을 판소리로 재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순신가』는 이순신의 전 생애를 판소리에 담았다. 어머니 태몽부터 시작해 이순신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특히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에 방점을 찍었다. 예컨대 전쟁 중에 모자 상봉을 다룬 대목에선 이렇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중중모리에 실린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 부인의 노래다.
“고달픈 나날 살아온 내 아들. 잘 가거라, 어서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이순신이 유배가는 장면에선 그의 통한의 목소리가 자진모리로 몰아친다. “나는 이제 조선 수군의 장수도 아니요. 명줄만 붙어 있는 산송장에 불과하다. 어디메에 내가 서 있단 말이냐.”
김씨는 1947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야금을 처음 시작해 3학년 되던 해에 판소리로 전향했다. 서라벌 예술대학 국악과를 졸업하고, 순천여고에서 잠시 교사 생활도 했다. 스물다섯 살에 여수로 시집 오면서 판소리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이후 15년간 고 한농선(1934~2002) 명창에게서 흥보가를 사사했다. 흥보가 전수자로서 자리를 굳혔지만, 그를 불러주는 무대는 거의 없었다.
2000년 여수시립국악단장을 맡았다. 여수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활동했던 곳이다. 거기서 김씨는 인간 이순신을 만났다. 그는 “명장으로만 생각했던 이순신 장군에게서 평범한 아들, 아버지, 지아비의 모습이 읽히자 전율이 일었다”고 했다. 김씨는 그때부터 『난중일기』 『불멸의 이순신』 『칼의 노래』 등 국내에 출간된 이순신 관련 문헌을 죄다 훑기 시작했다. 이순신가 창작에 몰두하던 김씨는 2008년 10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15분간 기립박수가 터졌을 때, 김씨는 생각했다. “이순신가를 듣는 사람들에게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가 그림처럼 펼쳐지면 좋겠다.”
김씨는 돌아가신 법정 스님과 40여 년 간 교류한 인연이 있다. 법정 스님은 『이순신가』에 실린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의 소리에 한이 배어 있다면 홀로 감내해야 했던 가슴앓이의 응어리가 소리로 피어난 것이리라.’
김씨는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여수 웅천 해변을 걷는다. 판소리를 부르며 목을 가다듬는다. 20년 넘게 지켜온 습관이다. 3일 새벽에도 김씨는 웅천 해변을 돌며 이순신가를 불렀다. 김씨는 이순신가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우리 문화재보호법은 100년 넘은 판소리에 대해서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순신의 생애는 그 자체가 문화재다. 판소리로 작창된 이순신은 문화재로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