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제독의 흔적을 찾아서--
park jong seok
2009-05-31
16,969
-충무공의 리더십을 연구하며 여행을 즐기는 테마여행 이 있다.
이름하여 < 이순신 파워 리더십 버스>
2009년. 5. 15일 새벽 택시를 타고 충무로 명보극장앞으로 달려간다.
중구청에서 구청직원들이 나와 감사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 이 순신 리더십 강의 (발명가 김동환 사장)를 들으며 여행이 시작된다. 진해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통영, 한산도를 둘러보는 여행 코스. 임진왜란 때 우리의 화력이 더 우세 했다는 것 , 우리의 해역에서는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이 유리했다는 것, 이순신 제독의 인간적인 면, 당시 육군 장군들 (경상좌도 박홍, 경상 순찰사 김수, 이 일과 신 립 도원수 김 명원) 의 형편없는 행적, 의병과 이름없는 백성들의 활약상을 공부하며 맛있는 회와 음식을 함께하는 테마여행으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 명보극장 앞 대로변에 설치된 이 순신 제독 생가터.
- 이순신장군의 생가가 서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 이 순신 장군의 영정.
- 식년 무과 병과에 최초 합격, 받은 교지
- 임진왜란때 사용된 천자 총통
- 진해 해군사관학교 전경
- 통영의 아침.
- 이번 여행의 백미는 한산대첩의 현장- 한산도.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로 건너가면 맨 먼저 거북선 등대를 만난다.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한산문을지나 제승당에 닿는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장수들과 회의하며 전쟁을 지휘하던 공간.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천혜의 요새다.통영 박 정욱 선생의 구수한 입담으로 펼쳐지는 이 순신 제독에 관한 이야기는 한껏 귀를 즐겁게 한다.
제승당 뒤편에 이 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한산정. 정자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145 m. 당시 일본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50 여 m, 재 장전의 시간이 3분여인 것을 감안하면 전투 장비만으로는 밀리지 않았았다는 사실. 문제는 총소리에 놀라 먼저 도망간 장수들의 문제였음을 알게 된다.
제승당 끝에는 수루가 있다. '물위의 정자란 뜻'이 아니다. 일종의 망루로 전망대이며 전략실이며 회식 공간이기도 했다 "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로 시작되는 '한산도가"의 산실이기도 하다.
- 삼군통제영. - 세병관. 현존하는 조선 최고 최대의 단일 목조건물이란다. 당시 수군최고 사령관 통제소요,거처요, 작전실이요, 임금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었다. 당시엔 100 여개의 부속 건물이 있는 조선 최고의 군영인 셈이었다.
- 통제영 지도. 당시 통영의 모습을 용의 형상으로 그렸다. 그래서 통영 사람들은 충무보다 통영이라는 이름을 택했단다.
-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거북선 모형도.
* 1545년 3 월 8일 한양도읍 건천동(지금의 명보극장 앞)에서 태어난 이 순신. 1576년2월 32의 나이에 식년 무과 병과에 4등으로 합격한다. 1589년에 전라 정읍현감, 1591년 2/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한다.
1592년.4월에 거북선을 완성하니 그가 얼마나 급히 거북선을 제조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군의 침입을 예견했던 것. 그해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란이라기 보다는 한일 전쟁. 전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침입이었다. 그해 6/14일에 평양성이 함락되니 파죽지세로 올라온 셈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식민지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해전 승리의 의미는 병참로의 차단으로 전쟁을 소강상태로 진입케 하여 명나라의 지원을 가능케 한 것. 당시 왜는 명을 침입허려는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 동북아의 세계지도가 역사를 달리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 된다.
1593년. 7/14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 8/10 정철총통 제조, 8/15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1597년. 2/26일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기까지(3년 7개월여)가 이순신제독 일생의 최전성기이다. 당항포, 장문포 해전, 우수영시찰, 둔전등을 경영한다.
원균의 연전연패로 1597년. 4/1 백의종군. 7/23 삼군통제사로 재임명, 8/3 임명교지를 받는다. 1598년 7/16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를 편성 11/ 19일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제독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굳이 몇마디로 함축한다면 <소통과 친화력>, <비전과 도전정신>그리고 <세밀하고 철저한 준비 정신과 기본에 충실> 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절대 열세의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것은 급격한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의 조선, 판옥선에 갑판을 덮은 거북선의 창제. 지형과 해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 정보수집에 의한 적절한 전략수립, 절체절명의 순간에 펼치는 학익진 전법 등 상대방을 교만케 하고 아군은 최소의 희생만을 허용하는 이순신제독의 리더십과 전략에 의한 승리였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숭앙을 받는 이유를 크게 대별하면, 그가 최종적으로 받든 존재는 백성이었다는 것, 부하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베풀어 스스로 따르도록 했다는 점. 변화에 대한 예견과 창의정신, 지 와 용을 겸비하고, 전체의 형세를 정확히 보면서도 준비 하는데는 세밀하고 철저했다는 점, 그리고 겸손과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에 있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훌륭한 테마 여행을 기획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배려하시는 이부경 사장님, 김동환 강사님, 해군사관학교 관계관, 그리고 재미있는 여행을 유쾌하게 함께 할 수 있었던 동행자들에게 감사 드린다. 사진을 카메라로 담고, 컴에 옮기는 데이터 통신이 없어 구하느라 늦게야 후기를 올리는 점 양해 드린다.
- 그런데 사진 등록이 안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