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2월 23일 (목) 21:10:24 지면보기 11면 중부매일 jb@jbnews.com
지금 우리 사회는 구심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분중(分衆)사회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념, 세대, 빈부격차, 성별 차이를 비롯한 학연, 혈연, 지연, 종교연 등으로 갈갈이 찢겨져 왔다. 이대로 갈 경우, 우리 사회의 분파(分派)구조는 새로운 갈등요소의 추가로 해결 불가능의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철지난 정치 이념으로 우리 사회의 분파구조를 교묘히 자극 선동하며,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쓰나미(つなみ; 해일)는 해저 지진, 해저 화산 폭발, 단층 운동과 같은 급격한 지각 변동이나 빙하 붕괴, 핵실험 등으로 발생하는 파장이 긴 천해파를 말한다. 쓰나미의 무서운 실체는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강진(强震)과 그에 따른 원전(原電)폭발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영화 ≪해운대≫나 ≪투모로우≫가 더 이상 픽션이 아니라 팩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재해인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 쓰나미의 강력한 충격파다.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심단층(心斷層)이 전쟁, 폭동, 이념 차이, 빈부격차 등의 불만 요인들이 폭발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위험이 바로 인간 쓰나미다. 2008년 5월 2일부터 시작된 광우병 촛불시위와 무상급식 논란이 그 대표적 사례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심단층은 생명을 다한 사단층(死斷層)이 아니라 활단층(活斷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종북(NL계열)좌파가 논란의 불씨를 지피고, 좌파 정당과 방송사의 무책임한 왜곡보도가 기름칠을 해대면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지금은 SNS의 활성화로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최우선 해결과제는 국민대통합을 통한 분중사회의 극복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해법을 이순신 리더십에서 찾았으면 한다.
국민대통합의 해법은 이순신 리더십에 있다!
서울에서 출생한 이순신은 충남 아산의 외갓집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32세 때 무과에 합격한 후 전국 오지를 돌면서 근무했다. 47세에 전라도 여수지역의 해상방위를 책임지는 전라좌수사가 되어 7년 동안 경상도 바다를 완벽하게 지켜냈던 인물이다.
이순신이 조일전쟁의 발발을 최초로 인식한 시점은 1592년 4월 15일 해질 무렵이다. 그날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에게 왜적의 침략 사실을 2회에 걸쳐 통보하면서 구원요청을 했다. 이순신은 곧바로 구원에 나서지 못했다. 예하 부대의 모든 전선(戰船)을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결집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데다 조정의 사전허락 없이 함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 2일 이순신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부하 장수들과 작전을 짰다.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다가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군수 신호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라고 썼다.
다음날 오후 이순신은 광양 현감 어영담과 흥양 현감을 불러서 경상도 바다로 출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또 녹도만호 정운이 그를 찾아와서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을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그 말을 듣고 방답 첨사 이순신을 불러 5월 4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조정에다 ≪장계≫를 써 보냈다. 마침내 이순신 함대의 역사적인 첫 출전이 시작되었다.
전라도 지역의 해상 방위를 맡았던 전라좌수영의 이순신과 그 핵심참모들이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경상도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주저없이 출전했던 그 넓은 마음이 다름 아닌 국민대통합의 프로토타입(原型)이다.
국민대통합을 원한다면, 이순신처럼 생각하고 일하라!
우리가 활단층의 위험을 극복하고,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대통합을 일궈내기 위한 작은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이순신이 실천했던 일처리 방식의 부활이다.
우선 막강한 권한과 행정력을 가진 공직자들부터 '백성이 으뜸이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마지막이다.(民爲貴社稷次之君爲輕)'는 맹자의 얘기에 주목해야 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종2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면서도 결코 거만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낮은 자세로 일하는 서번트 리더십으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경상도 피난민들에게는 여수 돌산도와 같은 피난처를 제공했고 둔전경영에 참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식량과 군량을 함께 조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그는 해전을 벌이는 긴박한 순간에도 백성들의 안위(安慰)부터 걱정했다. 일례로 1592년에 치러졌던 당항포해전과 안골포해전에 대한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왜군 전함을 모조리 격침시키지 않고 반드시 1~2척은 남겨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궁지에 몰린 왜적들이 육지로 상륙해서 조선 백성들을 살육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왜적을 쫓는 순간에도 궁구불박(窮寇不迫)의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갈등을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들과 함께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있는 자'와 '가진 자'가 먼저 베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서서 실천했다. 상놈들은 자신들을 천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일반 백성으로 인정해 준 이순신의 따뜻한 인간애에 환호하며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순신의 태도에 감동한 중 혜희(惠熙)는 승병을 규합해서 조선 수군에 자원입대 하도록 도왔고, 당포의 목동 김천손은 "왜군 전함 73척이 지금 견내량에 정박해 있습니다."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들은 모두 조선 사회의 비주류 계층 사람들이었다.
또 이순신은 1593년 6월 12일자 ≪난중일기≫에다 '(중략)...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하니 참 가엽다.'고 적었다. 조선 사회에서 '종(從)'은 인간이 아니라 양반들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들의 가치는 사찰에서 종소리를 내는 종(鐘)만큼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의 아산 본가(本家)나 병영(兵營)에서 심부름하던 종들의 이름까지 일기에다 꼬박꼬박 기록해주었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을 느끼면서 명복을 빌었다. 그는 종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던 장군이었다.
만약 우리 사회의 지체 높은 권력자들이, 돈 많은 재벌기업가나 거부(巨富)들이 이순신과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사회적 기부에 앞장서고, 가난한 이웃들의 사회적 고통을 함께 하려는 노력을 시도한다면 '자본주의 4.0시대'의 도래는 한층 빨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국민대통합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게다가 이순신은 학연, 혈연, 지연(地緣), 종교연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순신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연(事緣)과 지연(知緣)뿐이었다. 즉 '누가 어떤 일(事)을 가장 잘 하는가', 또 '그 사람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知)인가?'를 주목했다.
그는 '의심이 가면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100% 신뢰하라.'는 의인막용 용인물의(疑人莫用 用人勿疑)를 실천하며 부하장수들을 믿고 권한위임을 잘했던 장군이었다. 어쩌면 경영의 달인이라고 평가받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용인술도 이순신의 참모론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거북선 건조는 나대용, 화약 제조는 이봉수, 정철총통 개발은 정사준, 적정 정보는 제만춘과 임준영, 척후는 김완과 김인영, 둔전경영은 정경달, 군량 확보는 이의온, 바닷 물길은 어영담의 몫이었다. 이들은 해당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으며, 그들의 고향 또한 제각각이었다. 불패신화를 써내려간 이순신의 파워 인맥은 그렇게 해서 구축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또 하나의 작은 조선 역사가 되었다!
# 김덕수 교수는
▶공주대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청주고,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사· 경제학 박사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 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등 16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