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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한산도가' 작시 배경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4-29

조회 21,736

‘한산도가’의 작시 배경

‘한산도가’는 『全書』에 한시(漢詩)로 수록 되어 있고, 한글 시조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고금가곡, 가곡원류, 협률대성, 해동악장, 화원악보 등의 가집(歌集)에 편찬되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전승(傳承)되어 왔다. 노산 이은상은 “본 시는 이순신이 우리말 시조로 읆었던 것”을 『全書』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실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시조 문헌에 모두가 각각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서 해동가요에 실린 것을 표준으로 삼아 현대어로 만들었다. “그 까닭은 이 시조 구절과 이순신전서에 실린 한문 변역이 가장 서로 부합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산도가’는 도체찰사 신숙주 휘하에서 야인들을 격퇴할 때(1460년) 별시위(別試衛)로 활약했던 박위겸(朴撝謙)의박위겸은 “젊어서 생원(生員)으로 무반(武班)에 들어가 북정(北征)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나 그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안(天安)의 구룡산(九龍山) 아래 물러가 살면서 채마밭을 만들어 오이를 심고, 또 금주(琴酒)로써 스스로 즐기며 지냈다.” (김종직의 ‘題朴部長謙閑居詩卷’) 칠언절구와 시정(詩情)을 같이 한다.

박위겸의 시와 이순신의 ‘한산도가’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위겸

十萬貔貅擁戍樓
深夜邊月冷狐裘
一聲長笛來何處
吹盡征夫萬里愁



십만 명 날랜 군사 수루를 지키자니
변방의 달 밝은 밤 옷깃이 차거 운데
어디서 긴 피리 소리 들려와서
사나이 가슴에 시름을 자아내는고.

이순신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何處 一聲羌茄 更添


閑山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가 남의 애를 끊나니.


< 수루 - 달빛 – 피리소리 – 시름>으로 연결된 시어(詩語)를 보면, 변방 무인의 독측한 정서가 ‘한산도가’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순신은 100년 전의 무인, 박위겸이 남긴 이 시를 감명 깊게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이를 한산섬의 달 밝은 밤의 시름으로 시적 이미지를 절묘하게 형상화하여 박위겸의 한시에 화답하듯 시조로 변용(變容)한 것이다.

한시(漢詩) 시인들이 동시대 혹은 시대를 초월한 전대(前代)의 시를 화운(和韻)하여 작시(作詩)해 온 사례가 무수히 많다. 앞서 그 예를 본 바와 같이 화운한 시를 다시 화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시의 정형화가 이루어진 당시(唐詩) 이후, 많은 한시가 그렇게 작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운은 시를 짓는 선비들에게 통시적(通時的), 공시적(共時的)으로 긴밀한 소통의 방법이었고, 학문과 삶을 전승하며 확장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우리 현대시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었다.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화답하여 박목월의 시 ‘나그네’라는 명시가 탄생했다. 1946년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3인 시집으로 발간된 시집 청록집에 조지훈의 시, ‘완화삼琓花衫 –목월에게’와 박목월의 시, ‘나그네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 이라고 되어있다.

이순신은 박위겸의 칠언절구를 한시가 아니라, 한글 시조로 변환시킨 특이한 방법을 선택했다. 만일 한시로 화운했다면, 오늘의 한글 시조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한시로 화운하여 칠언절구로 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까닭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왜 한글 시조로 '한산도가'를 만들었을까? 그 해답은 역시 공의 ‘우국충정(憂國衷情)’에 있다. 공은 선비들의 전유물인 한시를 여러 편 썼지만, 그 한시를 읽을 수 없는 민초들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으로 수많은 아픔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고자 했던 뜨거운 충정(衷情)이 솟아올라 시조를 지었다고 추측된다. 한글 시조는 한자와 한시를 알지 못해도 심지어 한글조차 몰라도 누구나 구전(口傳)으로 흥얼거리며 마음의 노래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시조가 먼지이고, 그 후에 시조가 한시로 번역되었는가? 한시와 시조의 어구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한시에는 ‘閑山島’이고, 시조에는 ‘한산섬’이다. 만일 <선(先) 한시-후(後) 시조>로 작시되었다면 시조에도 ‘한산도’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라는 절묘한 정서와 “한산도 달 밝은 밤에”를 비교해 보면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또한 시조의 “애를 끈나니(긋나니)”, 즉 ‘애간장을 자른다’는 통절(痛切)한 여운(餘韻)를 한시로 옮기면서 매우 단순하게 “다시 시름을 더하다(更添愁)”로 번역되어 시의 맛이 떨어진다. 그 반대 순서였다면, “애를 끈나니”라는 표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시의 형식에 익숙하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수(愁)-수(愁) 방식으로 한시처럼 각운(脚韻)을 맞추면서 상당히 다른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시조에 사용된 한글 표현의 독자성이 잘 보존되어왔고, 후세에 여러 가집에 시조가 편찬되고 구전(口傳)으로 전해 왔기 때문에 <선(先) 시조-후(後) 한시>라고 견해가 타당하다.

시조 ‘한산도가’를 한시로 번역한 시기를 일반적으로 후대, 즉 『全書』를 편찬했던 1795년(정조 19년)까지 늦추어서 짐작하는 견해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아래에 제시할 이응표 장군의 족보에 기록된 자료, “공이 한산도에 있었을 때 이충무공(公在閒山島時李忠武)”으로 시작되는 화답시의 배경 설명을 보면(각주 34) 참조) 한글 시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거의 동시대라고 생각된다.

'한산도가'는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를 비롯한 21종의 가집(歌集)에는 국한문 혼용 시조로 수록되어있다. 특이 하게도 모든 역사 자료를 한문으로 저술했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776년)에는 시조 ‘한산도가’를 국한 혼용이 아니라, 완벽한 한글 시조로 싣고 있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歌曰 한산셤달발근밤의위루의혼자안자일장검겻노코긴한숨는밤의어듸셔일셩호가남의를긋니”
이은상도 『全書』의 번역 참고란에 이긍익이 채집하여 한글로 수록됨 점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구전(口傳)의 역사를 참고하여 순수 한글 시조의 “문헌적 가치”는 길이 보존되어 할 것이다. (*)
ah903 이 글은 조신호(2013), 「시와 문학을 통해 본 이순신」,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19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2017.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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