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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죽은 민중의 일곱무덥, 일제가 하나로...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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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죽은 민중의 일곱 무덤, 일제가 하나로.. 임진왜란 초기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몰한 무명 의사들을 기리는 동래의총오마이뉴스 | 정만진 | 입력 2016.07.18 15:33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동래의총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그 오른쪽에 선정비 비석군이 보인다.
ⓒ 정만진

1592년 4월 15일, 일본 침략군의 공격을 감당해내지 못해 동래읍성이 함락된다. 동래부사 송상현,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 동래교수 노개방과 그의 제자 양조한 그리고 문덕겸,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등이 전투 과정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또 부사의 첩 금섬, 부민 김상과 그를 도운 두 여인 등도 죽음을 맞이한다. 뿐만 아니라, 성내에 있던 모든 부민들까지 이날 목숨을 잃는다. (동래읍성 전투에 대해서는'왜장들까지 애도 표시한 한 선비의 죽음'기사 참조)


이때 죽은 이름 없는 부민들을 기리는 무덤이 1731년(영조 7)에 만들어진다. 퇴락한 동래읍성을 고쳐쌓는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남문터 좌우에서 임진왜란의 흔적들을 다수 발굴한다. 이 일이 '임진동래의총(義塚)' 조성의 단초가 되었다.


1731년에 조성된 동래읍성 전투 전몰 무명 용사들의 무덤


남문 유적에서는 부서진 창, 화살촉, 적군의 포탄만이 아니라  '순사(殉死)한 이들의 많은 유골이 함께 출토되었다. (동래부사 정언섭은) 그중 형골이 완연한 12구의 유해와 무수한 잔해를 거두어 베와 종이에 싼 후 상자에 넣고, 부의 남쪽 삼성대 서쪽 구릉(내성중학교 부근)에 육총(六塚)으로 모시고, 壬辰戰亡遺骸之塚(임진전망유해지총)이란 비석을 세웠다.'


작은따옴표 안의 내용은 동래의총 내삼문 바로 앞 '임진동래의총 정화 기념비'의 해설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빗돌 제목에 '정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부적절한 어휘 사용의 예시로 작문 시간에 거론될 사안이지만, 그래도 해설문 자체는 간결하고 명쾌하여 답사자의 궁금증을 깔끔하게 풀어준다.









 동래의총 외삼문 안으로 방문객 부부가 들어서고 있다. 삼문 왼쪽에 동래의총의 역사 및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 과정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정화 기념비는 '임진왜란 때 바다를 건너 몰려온 왜의 대군을 맞아 이곳 성민(城民)들은 나라의 관문이요 향토인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모든 성민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면서 '이때 순사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곳이 이 무덤'이라고 해설한다. 동래의총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이다.

본래 6총이었던 의총은 그 후 7총으로 늘어난다. 1788년(정조 12) 동래부사 이경일(李敬一)이 우물을 파던 중 유골 1구를 발견, 육총 곁에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들어 무덤들은 복천동 뒷산 영보단(시립박물관 복천분관 내)으로 옮겨져 합분된다. 일제는 민족 정신 말살 차원에서 의총들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강제 이장했고, 또 합쳐버렸던 것이다. 임진동래의총이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의 일이다.
 
현창시설 들어가는 길다운 풍경의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


임진동래의총의 현주소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7-67이다. 찾기 쉽도록 안내하려면,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바로 뒤 또는 금강공원 내 금정사 바로 옆에 있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게 안내하면, 임진동래의총이 인파가 들끓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빨리 연상시킬 수 있다. 우장춘로 157-67 지점이 의총 탄생 내력과 무관한 곳이라는 사실은 아쉽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세워졌다는 점만큼은 다행한 일이다.









 의총 앞에 서 있는 충혼각
ⓒ 정만진

해양자연사박물관을 찾은 사람들, 공원 안을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박물관과 의총 중간의 잔디밭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금정사와 금강사에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외삼문으로 간다. 드문드문 외국인 답사객들도 외삼문 아래로 들어선다. 외삼문 지나자 마자 오른쪽 산비탈에 줄을 지어 선 20여 기의 선정비들이 답사객을 환영한다. 왼쪽은 금정사 담장이다. 선정비들과 사찰 담장은 이 길을 의총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답게 만들어준다.








 동래의총비. 앞면에는 '壬辰戰亡遺骸之塚(임진전망유해지총)' 여덟 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의총을 조성하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웠다.
ⓒ 정만진

길 끝에 정화 기념비가 있고, 비 오른쪽에 내삼문이 세워져 있다. '임진 동래의총 정화 기념비'의 본문을 읽은 다음, 이윽고 내삼문 안으로 들어선다. 경내는 소나무 숲이 아늑하고, 뜰 복판에 충혼각이 솔내음을 풍기며 향기롭게 서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충혼각 왼쪽으로 나 있다. 임진동래의총은 이 건물 뒤에 있다. 웅혼한 소나무들과 충혼각 사이를 걸어 의총 영역으로 올라서는 계단 앞에 선다. 계단 왼쪽으로는 대숲이 울창하고, 그 대나무 숲 앞에는 동래의총비(東萊義塚碑)가 서 있다.

동래의총비 앞면에 새겨져 있는 '壬辰戰亡遺骸之塚(임진전망유해지총)' 여덟 글자를 읽는다. 임진전망유해지총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분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이라는 뜻이다. 외적의 침입에 맞서 분연히 싸우다가 돌아가신 선열들의 위대함이야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름 석자를 후세에 남기지 못한 분들일지라도 이렇게 묘소를 만들어서 정성껏 기리는 후세인들의 마음도 아름다운 미덕으로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대숲 앞에 세워져 있는 동래의총비


동래의총비 바로 오른쪽 뒤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의총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뒤로 갈수록 땅이 높아지고, 그 둘레를 따라 와가식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 묘역의 가운데에 작은 왕릉만한 봉분이 놓여 있다. 무덤 하반부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화강암으로 둥글게 막아 두었다. 


묘소 앞에서 참배를 하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우리 선조들의 일곱 무덤을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저희들 마음대로 합분까지 해버렸구나!' 하는 탄식이 일어난다. 임진동래의총은 이렇듯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본인들의 야만에 핍박받은 우리 선조들의 어두운 역사가 짙게 서려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가, '소주 한 병 들고오는 정성마저 잊었다' 싶은 민망함에 더욱 고개가 숙여진다.









 1592년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 때 전몰한 이름없는 전사자들을 기려 조성된 동래의총. 사진은 무덤 뒤편 높은 지대에 올라 바라본 풍경이다. 무덤 앞에 충혼각이 있고, 그 오른쪽 대숲 아래에 조그마하게 의총비가 보인다.
ⓒ 정만진

오마이 뉴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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