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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헐어버리려한 사당, 거짓말로 지켜내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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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헐어버리려한 사당, 거짓말로 지켜내다 임진왜란 때 죽은 양지, 양조한, 양통한을 기리는 부산 삼절사오마이뉴스 | 정만진 | 입력 2016.07.22 15:18

 















 외삼문 입구 왼쪽에 세워져 있는 전체 배치도. 이런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은 그만큼 삼절사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정만진

길가에 '忠節의 고장 盤松洞'이 새겨진 큰 돌이 서 있다. 여기가 반송동 입구인가 보다. 이어, '충절의 고장 반송동'이라고 적어 두었으면 모두가 읽을 수 있고, 그러면 반송동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좀 더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일어난다.

반송동은 반송이 많이 자란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런가 하면, 반송동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영예를 획득한 것은 마을 안에 있는 삼절사(三節祠) 덕분이다. 삼절사라면 높은 충절을 보여준 세 분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반송동의 영예를 드높여주는 삼절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반송로182번길 24에 있는 삼절사에 도착하면 모두들 외삼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부터 보게 된다. 이 안내판 앞을 지나지 않고는 웬만해서는 외삼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까닭이다. 당연히 하마비(下馬碑)는 있을 이유가 없다. 삼절사 외삼문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좀처럼 차량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내판에는 삼절사 전체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배치도는, 외삼문까지 들어오는 골목길은 좁지만 삼절사 경내 자체는 상당히 넓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삼절사는 약 400여 평의 대지에 위패를 모신 사당, 서원이라면 강당에 해당되는 세한당(歲寒堂), 동재에 해당되는 모현관(慕賢館), 서재에 해당되는 반송재(盤松齋), 관리사인 모현관 아래 1층 건물 등이 들어서 있고, 정원에서 세한당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 세한당과 사당 사이의 넓고 깔끔한 잔디밭 등 웅장한 면모를 자랑한다.









 외삼문을 등진 채 바라본 세한당과 오른쪽의 관리사(1층) 및 자료관 모현관(2층)의 모습. 사당은 세한당 뒤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답사자가 삼절사 경내로 들어서면 세한당으로 올라가는 웅장한 계단에 가장 먼저 눈길이 사로잡힌다. 계단 입구 좌우 난간석에는 '난리를 당하여 나라를 잊지 않음이 충이요, 백성들의 상처를 슬퍼하는 마음이 민'이라는 뜻의 臨亂不忘國曰忠 使民悲傷曰愍 열여섯 한자가 새겨져 있다. 양지의 시호 충민(忠愍)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그렇게 풀어서 돌에 새긴 것이다.
ⓒ 정만진

문화재청 누리집은 '삼절사는 양지(梁誌), 양조한(梁潮漢), 양통한(梁通漢)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씨 일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양지는 경기도 광주 군수로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고, 양조한은 동래성에서, 그의 아우인 양통한은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순절하였다.'라고 해설한다.

삼절사는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절사의 건물들은 '1839년(헌종 5)에 동래부사 이명적(李明迪)이 세웠는데, 그 뒤 (2011년 사당을 이전, 복원하는 등) 몇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 모습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온갖 수난을 겪는 삼절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설명은 좀 더 풍부하다. 대전은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제의 탄압이 혹심하여 반송삼절사의 삼위 위패를 사가(私家)에 봉안하고 제향도 밤중에 지냈으며' 일제가 '사우(祠宇, 사당)마저 헐어 버리려는 것을 창고라고 속여 간신히 보존'한 사실 등 삼절사의 일제 강점기 수난사를 말해준다. 또 '각종 현판과 기록 문서 등도 압수되어, 현재는 삼절사 세한당의 현판만 보존되어 있다.'면서 조상을 기리는 집과 자료들을 보존하려고 애쓴 선조들의 노고도 증언해준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 송공단 경내, 송상현 부사비 옆에 양조한을 기리는 비석 <梁公潮韓殉難碑>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潮가 朝로 잘못 새겨져 있다.) 양공조한순난비 옆의 비는 동래향교에서 함께 순절한 문덕겸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다.
ⓒ 정만진

대전은 세 선열에 대해서도 문화재청 누리집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준다. 대전은 '양지(1553~1592)는 적성현감을 거쳐 삭녕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였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양조한(1555~1592)은 동래향교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봉안된 성현들의 위패를 동래읍성 내의 정원루(靖遠樓)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라고 해설한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 송공단 경내, 송상현 부사비 오른쪽에 양조한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양조한이 동래향교에서 전사할 때 그의 외아들 양홍(梁鴻)도 함께 순절했다. 이날 양조한의 손자 양부하(梁敷河)는 12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는데, 시쳇더미에 깔려 있어 왜적의 칼에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해야 했다. 결국 양부하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39세나 되어서야 돌아온다.









 동래향교, 1592년 4월 15일 당시 양조한 등이 왜적들과 싸우다 순절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이 다시 지었고,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이 현재 자리로 옮겼다.
ⓒ 정만진

대전은 특히 양조한의 아우 양통한(1559~?)에 관해 '경주 문천회맹(蚊川會盟),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에 참여했으며, (두 아들 의와 숙을 데리고) 창녕 화왕산성(昌寧火旺山城)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순절했다. 이후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면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회맹 사실까지 설명해준다. 경주 문천회맹은 1592년 6월 9일 경주, 울산, 영천, 영일, 흥해, 장기, 양산, 동래, 대구 등지의 의병장들이 경주성 탈환을 위해 반월성 주변 남천에 모인 것을 말한다.

최효식의 <경주부의 임란 항쟁사>에 따르면 '경주부가 중심이 되어 통문을 발송'하자 5월 28일 동해안에 머물고 있던 의병장 이언춘은 월성으로 진지를 옮겨온다. 경주부윤 윤인함이 단기를 달려와 격려를 한다. 그 다음날인 5월 29일 이계수 등 10여 의사가 오고, 6월 2일에는 최동보도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 이윽고 6월 7일 경주판관 박의장의 관군까지 합세했을 때에는 문천회맹에 참가한 장졸들이 무려 4200명에 달한다.


경주성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월성 아래에 모인 의병들


이때 경주에서 견천지, 권사악, 권응생, 김난서, 김득추, 김득상, 김득복, 김광복, 김응복, 김응생, 김응택, 김만령, 김몽화, 김몽양, 김영수, 김이관, 김천석, 김춘룡, 김홍휘,  박영립, 박인국, 백이소, 서은적, 오열, 이계수, 이눌, 이대립, 이몽룡, 이방린, 이삼한, 이승급, 이여량, 이용갑, 이원명, 이의잠, 이창후, 이팽수, 최해남, 최봉천, 최계종, 황희안, 황희철, 손시, 손엽이 왔다. (손엽에 대해서는'임진왜란 때 책과 초상화부터 피란보낸 경주사람들'참조)









 서원이라면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 세한당. 삼절사는 이 세한당 뒤에 사당을 둠으로써 서원의 일반적인 건물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 정만진

대구에서 손처겸, 최동보, 최인이 왔고, 당시 경주부 관할이었던 자인에서는 김우련, 김우용, 박몽량, 안천민, 이춘암, 전극창, 최경지, 최희지가 왔다. 영천에서 서도립, 이지효, 전삼익, 전삼달, 정사진, 정세아, 정의번, 조경, 조시언, 조이절, 조이함, 조이항, 조덕기, 조준기가 왔다.

영일에서 김견룡, 김원룡, 김우결, 김우정, 김우호, 김천목, 권여정, 심희청, 안신명, 정대용이 왔고, 흥해에서 남경훈, 박몽서, 백중립, 이대립, 이대인, 이화, 이열, 정삼외, 정삼성, 정삼고, 정승서, 정인헌, 진봉호, 최흥국, 호민수가 왔다. 언양에서 신전이 왔고, 울산에서 고처겸, 김치, 박경열, 박문, 박손, 박봉수, 박응복, 박인립, 류정, 류영춘, 류백춘, 서인충, 서몽호, 이경연, 이승금, 이우춘, 이응춘, 이봉춘, 이한남, 윤홍명, 장희춘, 전응충, 전영방, 전개 의병장이 왔다.


더 멀리서도 말을 달리고, 또 걸어서 월성 아래 남천까지 왔다. 장기에서 서극인, 서방경, 이대임이 왔다. 양산에서 안근, 이몽난, 정호인, 정호의, 최기가 왔다. 그리고 동래에서 박희근, 이인의, 양통한이 왔다.


양통한을 비롯한 의병들은 6월 17일 언양에서 북진해오는 왜군들과 사천 전투를 벌여 적병 4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위용을 적들에게 한껏 떨쳤다. <경주부의 임란항쟁사>는 '(대구 의병 활동을 위해 모인) 팔공산 회맹, (정유재란을 대비해 모인) 화왕산 회맹보다 앞선 경주 문천회맹은 임란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면서 '이 회맹에 참여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곧 경주읍성 탈환 계획이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실천에 옮겨졌다.'라고 기술했다.









 동래읍성 북문 내부 바로 아래에 있는 동래읍성역사관의 읍성 모형.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양조한이 죽은 정원루, 파란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송공단이다.
ⓒ 정만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1736~1806)이 우리 역사에 남긴 방대한 저술이다. 59권 42책에 이르는 이 필사본 역사서는 저자가 42세에 시작, 타계할 때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완성했다. <연려실기술>은 1392년(태조)부터 1674년(현종)까지 283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대상으로 인용한 원전을 밝히고, 저자의 개인 의견 없이, 본문에 여백을 두었다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내용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이 남긴 조선 시대 최고의 역사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신병주, 네이버 캐스트 <인물 한국사>).'

신병주는 또 '이긍익은 국가의 공식 기록보다는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 중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편집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 <연려실기술>에 양조한의 손자 양부한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 실려 있다. 양조한이 중국 사신 심유경을 도와 풍신수길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도 대동소이하게 실려 있다. 아래는 <성호사설>의 '양부하' 부분을 현대문으로 번안하면서 부분 부분 읽어본 것이다.


<성호사설>과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양부하 이야기


'양부하는 동래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27년만에 돌아와 95세 때 죽었다. 판서 임상원(任相元)이 양부하로부터 일본에서의 생활을 직접 듣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자신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 실어놓았다. (임상원은 <염헌집>에 "내가 직접 양부하에게 들은 것이다." 하고 적었다.)


양부하는 12세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양반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백(關白, 풍신수길)에게 바쳐졌다. (중략) 수길이 "조선 아이가 일본 사람과 흡사하구나." 하면서, 역관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게 했다. 양부하는 3개월만에 일본말을 능숙하도록 습득했다. (중략) 수길이 양부하를 각별히 사랑하여 항상 옆에 있게 했다.









 삼절사의 외삼문
ⓒ 정만진

하루는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양부하가 수길에게 간청해서 만나보게 되었다. 중국 사신은 심유경(沈惟敬)이었다. 심유경은 객관(客館)에 엄중하게 감금되어 있었다. 심유경의 통곡 소리를 들은 양부하가 수길에게 사실을 보고했고, 수길이 심유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일로 양부하와 심유경이 친해졌고, 둘은 풍신수길 독살을 공모했다.) 심유경은 수길을 만나자 마자 환약을 먹었다.

심유경은 수길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환약을 먹었다. 수길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심유경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로 몸이 불편할 때마다 항상 이 약을 복용했는데, 먹고 나면 기운이 솟고 몸이 경쾌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중략) 수길이 "내가 며칠 전에 경도(京都)에서 돌아와 몸이 매우 피곤한데 나도 복용하면 어떻겠소?" 했다.


심유경이 주머니에서 환약 한 개를 꺼내어 수길에게 주었다. (아직 심유경을 의심하고 있던) 수길은 약을 반을 쪼개더니 "그대와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하오." 하였다. 심유경이 반쪽을 받아서 삼켰다. 수길은 한참 그 광경을 눈여겨 보았다. 이윽고 심유경이 팔뚝을 펴며 기운을 내자 수길도 마침내 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수길은 심유경을 만날 때마다 환약을 나누어서 먹었다.









 반송재, 삼절사가 서원이라면 서재에 해당될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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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둘이 나누어 먹은 그 약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심유경은 객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해독약을 복용했다. 하지만 수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길은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의원이 약을 써도 효험이 없고, 침을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중략) 수길이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더니 "말총과 맑은 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내가 죽거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오장과 육부를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말총으로 꿰매고 시체를 술독에 담아 두어라. 발상(發喪)하지 말고 비밀에 붙여라." 하고 첩들에게 유언했다.

그 이후 문병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첩들은 "약간 차도가 있다." 하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끝내는 시체 냄새가 밖으로 풍겨나가면서 대신들이 사태를 알게 되었다. 그때 수길의 아들 수뢰(秀賴)는 겨우 7세였다. (중략) 양부하가 귀국하기를 원하는 남녀 80여 인을 데리고 뱃길로 돌아오니 이때 나이 39세였다.


(중략) 오직 독환(毒丸)의 일은 달리 본 자가 없으니, 이는 외부에서 살펴서 알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밤낮으로 수길을 수발했던 양부하가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가 잊지 않고 술회하였으니 아마도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다.


(중략) 다만 수길이 죽기 전에 심유경이 먼저 형벌로 죽었으니 원통한 일이다. 이 일을 심유경이 발설하지 않은 것은 군사 기밀은 비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누설되면 큰 손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양부하가 일찍 돌아오고 심유경이 살아 있었더라면 공으로 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겠는가?'









 세한당 옆에서 바라본 삼절사의 모현관. 삼절사가 서원이라면 자료관으로 사용 중인 이 건물의 2층은 동재에 해당될 것이고, 1층은 전사청으로 쓰일 것이다.
ⓒ 정만진

양부하가 심유경과 공모하여 풍신수길을 독살한 일의 사실 여부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익은 심유경과 양부하가 함께 모의하여 풍신수길을 독살했다는 <염헌집>의 기록을 두고 '밤낮으로 풍신수길을 수발했던 양부하가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가 잊지 않고 술회한' 내용이니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라고 <성호사설>에 기술했다. 이긍익도 '개인이 남긴 조선 시대 최고의 역사 기록물'로 평가받는 <연려실기술>에 같은 기사를 수록했다. 신병주는 <연려실기술>에 수록된 내용들은 이긍익이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 중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했다.

양지, 양조한, 양통한, 양홍, 양의(蟻), 양숙(肅), 양부하의 4대에 걸친 충의를 자랑하는 남원 양씨(南原梁氏) 문중의 삼절사는 반송동의, 아니 부산의, 나아가 나라 전체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유적지이다. 그래서 경건하게, 걸어서 삼절사를 찾아간다. 골목길이 좁아서가 아니라 그곳에 서린 올곧은 정신이 사방을 가득 뜨겁게 달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운을 받아 내 마음도 저절로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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