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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부산 (7년 내내 식민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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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시작되고 끝난 '7년 식민지' 부산 부산과 김해 지역의 임진왜란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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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정만진 | 입력 2016.07.28 10:20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도 부산은 조선과 일본의 접점이었다. 일본의 국왕사 사절단이 부산으로 들어온 것은 물론, 조선의 통신사들도 출발 이전, 그리고 귀국 직후 부산에 머물렀다. 일본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100년 이상 중단되었던 통신사 교류를 재개한 1590년 3월, 세칭 '정여립 모반 사건'이 터진 1589년 10월보다 약 다섯 달 뒤에 황윤길 일행이 배를 띄운 곳도 부산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91년 3월 1일, 황윤길 일행이 배에서 내린 곳도 부산이었다. 황윤길은 부산에 정박하자마자 조정으로 파발마를 띄웠다. 파발마의 손에는 '일본은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必有兵禍)!'라고 쓴 황윤길의 치계(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은 전쟁 대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3년 내내 정여립 관련자를 색출하고 조작하여 1천여 명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만 골몰했다. 이윽고 황윤길의 귀국 보고 이후 약 13개월 뒤인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 진을 쳤고, 4월 14일 부산진성(첨사 정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다녀온 통신사가 전쟁 발발 가능성 예고했지만...








 동래읍성역사관(동래구 동래읍성길 18) 바로 뒤에는 장영실 과학공원도 있어 자녀들과 답사하기에 아주 조건이 좋다. 과학공원 끝이 동래읍성 북문이다.
ⓒ 정만진

일본 침략군의 선봉 소서행장 부대는 다음날인 4월 15일 동래성(부사 송상현)도 점령했다. 다대포성(첨사 윤흥신)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성이 함몰되자 겁을 먹은 나머지 동래성 전투에는 참여도 않고 뒷문으로 도주했다. 부산좌수영의 수령 박홍도 일본군의 전선들이 바다에 밀려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함선들을 바닷물 속에 침몰시킨 후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임진왜란 발발 직전 및 초기 양상과 관련되는 유적지들은 모두 부산에 있다. 조선통신사역사관(동구 자성로 99), 정발 첨사 등 부산진성 전몰 선열들을 기려 세워진 정공단(동구 정공단로 23, 기념물 10호), 송상현 부사 등 동래성 순절 의사들을 기념하여 건립된 송공단(동래구 동래시장길 27, 기념물 11호), 윤흥신 첨사 등 다대포 전투 전사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윤공단(사하구 윤공단로 112, 기념물 9호) 등이다.


특히 동래성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쟁 상황을 상징하는 싸움인 까닭에, 송공단 외에도 관련 유적이 많다. 이름없이 죽어간 용사들을 기리는 임진동래의총(동래구 우장춘로 155 금강공원 내, 기념물 13호), 송상현을 기려 1670년(현종 11)에 세워진 동래남문비(남구 대연동 부산시립박물관, 기념물 21호), 동래읍성과 동래읍성역사관(동래구 동래역사관길 18), 송상현 동상(부산진구 중앙대로 818), 동래향교에서 순절한 양조한 등을 숭앙하여 세워진 삼절사(해운대구 신반송로182번길 24, 문화재자료 1호)...... 모두가 빠뜨릴 수 없는 동래전투 유적들이다.


가장 많은 유적을 남기고 있는 동래성과 수영성


그런가 하면, 전투도 없이 적의 손에 넘어간 수영성이 답사할 만한 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점은 뜻밖이다. 수영구 수영성로 42와 43 사이에 있는 수영성 남문(유형문화재 17호), 경상좌수사 등의 기도처로 알려진 남문 안 곰솔(천연기념물 70호)과 수영고당(사당), 박홍이 줄행랑을 쳐버린 황당한 상황에서도 의병으로 일어나 유격전을 펼친 의사들을 기리는 25의용단(수영구 연수로379번길 42, 기념물 12호) 등이 그들이다.


수영성 관련 유적에는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壬辰倭亂左水營無主亡靈薦度碑, 수영구 광남로257번길 58)'라는 긴 이름의 답사지도 있다. 백산(白山) 옥련선원에 있는 이 비석은 1999년에 세워진 것으로, 좌수영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 영령들을 달래기 위해 건립되었다. 천도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백산 정상부 일대가 경상좌수사가 수시로 찾아와 오랑캐(夷)들을 살핀(?) 첨이대(?夷臺) 터이기 때문이다.









 옥련선원 종무소 뒤쪽에 세워져 있는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 뒤로 수영만 너머의 WBC더팰리스(ThePalace) 아파트가 우뚝 솟아 있다. 천도비가 1999년 이곳에 세워진 것은 이 일대 백산(白山) 정상부가 경상좌수사가 수시로 찾아와 오랑캐(夷)의 동태를 살피던(?) 첨이대(?夷臺) 자리이기 때문이다.
ⓒ 정만진

부산에 있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임진왜란 유적지도 있다. 이순신과 더불어 부산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정운 장군을 기려 세워진 정운공순의비(사하구 다대동 산145, 기념물 20호)가 그 주인공이다. 몰운대 끝자락에 있는 이 빗돌은 찾아간다고 해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역사유적이 아니다. 군사 통제 구역 안에 있는 탓에 사전 허가(051-261-6702)를 얻은 후에야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답사할 수 있다.

부산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첫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줄곧 일본군 점령지였다. 그래서 왜성이 많다. 특히 부산진지성(일명 자성대)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역사관까지 거느리고 있는 까닭에 답사하기가 아주 용이하고 또 풍성하다. 기차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부산광역시까지만 가면 볼 수 있는 왜성, 그곳이 바로 자성대이다.


전쟁 발발지, 줄곧 식민지... 많은 전사자


7년 내내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탓에, 그리고 전쟁 초기 피해 지역이었던 탓에, 부산에는 많은 전사자가 생겨났다. '사상 9인 의사 연구 제단(沙上九人義士戀舊祭壇, 사상구 괘법동 산17-3)'은 그 참상을 증언해주는 유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상 거주 청년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동래전투와 다대포전투가 끝난 뒤 살아서 귀가한 사람은 9명뿐이었다. 아홉 사람은 죽은 이들을 기려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선조들의 옛(舊) 마음을 그리워하며(戀) 변함없이 제사를 이어가고 있다.


많은 전사자와 오랜 기간의 피점령은 다른 그 어느 지역보다도 웅장하고 위엄있는 합동 사당을 부산에 낳았다. 충렬사(동래구 충렬대로 345, 유형문화재 7호)에는 여성 전몰 의사들을 기리는 의열각, 사당 본전, 안락서원 강당 소줄당, 송상현공 명언비, 동래24공신 공적비, 많은 대형 기록화들을 볼 수 있는 기념관 등 둘러볼 만한 시설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김해시 동상동 314번지에 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의 북문. 사진 왼쪽의 둥근 옹성 뒤로 보이는 산 정상부의 흰 띠는 삼국 시대 이래 이곳에 있던 분산성의 성벽이다.
ⓒ 정만진

다대포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김해로 몰려왔다. 김해부사를 비롯한 관군 지휘부는 줄행랑을 쳐버렸다. 1592년 4월 19일과 20일,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비롯한 김해 사람들은 1만3천여 일본 대군에 맞서 잘 싸웠다. 이들은 나라 안 최초의 의병이었다. 송담서원과 사충단(김해시 동상동 161, 기념물 99호), 송빈 의병장이 전투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서상동 고인돌(서상동 6-7, 기념물 4호), 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 북문(동상동 314) 등이 관련 유적이다.

1593년 9월, 권탁은 선조가 내린 <선조국문유서>를 품에 안고 일본군 주둔지에 접근했다. <선조국문유서>는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그들의 하수인으로 살고 있는 조선 백성들에게 탈출할 것을 권유하는 선조의 한글 편지였다. 권탁은 포로들을 설득, 일본군을 유인해낸 끝에 섬멸하고 조선 백성 100여 명을 구출했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큰 부상을 당한 권탁은 그해 11월 끝내 순절하고 말았다. 김해에는 권탁이 가슴에 품고 다녔던 <선조국문유서(보물 951호)>를 소중히 보관해온 어서각(흥동로 123-18, 문화재자료 30호)이 있다.


임진왜란과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꼭 들러야 할 곳이 산해정(대동로269번안길 115, 문화재자료 125호)이다. 산해정은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무수한 임진왜란 의병장들을 제자로 키워낸 남명 조식 선생께서 오랜 세월 동안 강학했던 공간이다. 임진왜란 때 불탔지만 안희, 허경윤 등 제자들이 중건했다. 허경윤은 일본군들이 수로왕릉을 파헤치자 다시 복원하고, 그 이후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로, 구천서원(상동면 우계리 811)에서 모시고 있다.









 <사명대사 충의비>가 대웅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천룡사(부산진구 성지곡로 33번길 43)의 풍경. 오른쪽 장독대 맨 위쪽에 사명대사비가 보인다.
ⓒ 정만진






부산과 김해 일원의 임란 유적 답사 순서

경부고속도로로 부산에 진입한 경우를 가정, 부산과 김해 일원의 임진왜란 유적 답사 순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부산>
1. 삼절사(해운대구 신반송로182번길 24, 문화재자료 1호)
2. 임진동래의총(동래구 우장춘로 155 금강공원 내, 기념물 13호)
3. 동래읍성, 동래읍성역사관(동래역사관길 18)
4. 동래향교(동래로 103, 기념물 61호, 대성전 유형문화재 6호, 명륜당 유형문화재 128호)
5. 송공단(동래시장길 27, 기념물 11호)
6. 충렬사(충렬대로 345, 유형문화재 7호, 송상현공 명언비- 소줄당- 기념관- 의열각- 사당 본전-
  동래24공신 공적비- 의중지)
7. 사명대사 충의비(부산진구 성지곡로33번길 43 천룡사)
8. 송상현 동상(중앙대로 818)
9. 25의용단(수영구 연수로379번길 42, 기념물 12호)
10. 수영성(수영성로 42와 43 사이, 유형문화재 17호, 남문- 남문 안 곰솔- 수영고당)
11.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광남로257번길 58 옥련선원 종무소 뒤)
12. 동래남문비(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 기념물 21호)
13. 부산진지성(동구 자성로75번길 29 맞은편, 서문- 영가대- 조선통신사 역사관- 동문- 최영
    장군 사당- 왜성 흔적- 진남문- 천장군 기념비)
14. 정공단(정공단로 23, 기념물 10호)
15. 윤흥신 장군 석상(중앙대로 331)
16. 정발 장군 동상(초량동 1148)
17. 윤공단(사하구 윤공단로 112, 기념물 9호)
18. 정운공순의비, 다대포 객관(다대동 산145, 기념물 20호)
19. 사상 9인 의사 연구 제단(사상구 괘법동 산17-3)
<김해>
20. 산해정(김해시 대동로269번안길 115, 문화재자료 125호)
21. 송담서원, 사충단(동상동 161, 기념물 99호)
22. 김해읍성 북문(동상동 314)
23. 고인돌(서상동 6-7, 기념물 4호)
24. 어서각(흥동로 123-18, 문화재자료 30호)
25. 구천서원(상동면 우계리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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