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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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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들 빠진 이상한 조선의 논공행상 [영천성 수복전투 ②] 승전의 의의에 걸맞는 포상과 역사적 평가 못 받은 임진왜란 대승오마이뉴스 정만진 입력 2016.11.02 10:13 수정 2016.11.02 10:17
'권응수가 영천의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의 적과 서로 응하여 한 길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선비와 백성들은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加資, 품계를 올려줌)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군수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 진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다.'
▲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묘소. 영천시 자양면 자양댐(요즘은 "영천댐"이라 부른다) 호변 도로를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강호정 등 정세아 가문 고택들의 정면 앞, 솔숲을 지나 공원묘지처럼 꾸며진 잔디밭을 끝까지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
ⓒ 정만진 |
영천성 수복, 임진왜란 전체에서 가지는 의의
그러나 그는 "이제 매복했다가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 중단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영천이 먼저 창의했기 때문이다. (중략) 영천의 500 의사들 중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포상은 2∼3명에게만 주어졌다"라고 비판했다. 임진왜란 극복이든 영천성 수복전 승리든 결코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공로가 아닌데도 수많은 의사들의 죽음과 피와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묵살하고 있다는 신랄한 질타이다.
▲ 영천시 권응수길 32-7(신녕면 화남리)의 '권응수 유적' |
ⓒ 정만진 |
<선조실록> 1592년 9월 2일자 기사 중에도 그런 의심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가 '박진에게 양피옷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다. 9월 2일이면 박진이 지휘하여 경주성을 되찾게 되는 9월 8일보다 전이고, 처음 경주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8월 21일보다 뒤이다. 즉, 박진은 영천성을 수복한 데 포상으로 임금에게서 양피옷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7월 27일 영천성 수복에 자신이 결정적 기여를 한 양 보고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만하다.
종합하면,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지만' 초유사 김성일이 영천 지역 의병대장으로 임명한 권응수에게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싸우게 양보하고 작전참모로 전투에 참가한 까닭에 성을 되찾은 후 '상을 못 받은(<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세아는 그냥 선비답게 고향에서 제자들을 기르고 학문을 연구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정세아의 예는, 1604년 6월 24일 공신 104명을 책봉할 때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은 한 명도 넣지 않고 그 대신 압록강까지 선조를 따라다녔던 내시 24명, 왕이 타는 말을 끄는 이마(理馬) 6명 등은 당당히 1등공신에 올린 사례에서도 확인되듯이, 조선 조정의 불합리한 논공행상이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의 현장을 둘러보니
영천성은 다 허물어지고 없다. (영천성 수복 기사는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참조) 그러나 당시 남문 일원에 있었던 조양각의 위용은 오늘도 당당하고, 그 아래를 흐르는 남천 또한 세월의 무게를 잊었는지 오로지 평화롭기만 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보는 조양각도 1368년(고려 공민왕 17) 정몽주가 당시 영천부사 이용 및 지역 선비들과 힘을 합쳐 건설했던 바로 그 정자는 아니다.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단도 거느렸고, 때로는 명원루 또는 서세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고려 말기 건물 조양각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당시 불에 타서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인조 때(1623~1649) 다시 지어진 것이다.
조양각은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쉬었다가 가는 중요 지점 중 한 곳이었다. 통신사는 일본으로 갈 때 한양을 떠난 이후 경안, 이천, 음죽, 숭선, 충주, 안보, 문경, 유곡, 용궁, 예천, 풍산, 안동, 일직, 의성, 의흥, 신녕, 영천, 모량, 경주, 구어, 울산, 용당, 동래를 거쳐 부산 앞바다로 닿았다. 그래서 조양각이 있는 영천시 문화원길 6의 조양공원에는 통신사를 상징하는 여러 게시물과 조형물이 흔히 게시되어 있다.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는 <'일본 침략' 정반대 대답한 조선통신사 두 사람> 참조)
▲ 기룡산 묘각사,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영천군수 김윤국은 이곳으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의병이 일어난 이후 산에서 내려와 의병들과 함께 대왜 항전에 투신했다. 영천성 수복 전투 때는 사람들이 대장으로 추대했으나 사양하고 김성일이 의병대장으로 임명한 권응수가 직책을 맡아 전체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
ⓒ 정만진 |
영천시 창대서원1길 9-18에 있는 창대서원은 임진왜란 의병장 창대(昌臺) 정대임을 모시기 위해 1697년 처음 지어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당해 훼철되었고, 1955년 녹전동 창대마을에서 지금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 뒤 20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차 복원하였다. 창대서원에는 현재 강당, 사당 충현사, 재실 유의재, '의병대장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창대 선생 신도비'가 남아 있다. 당연히, 창대서원은 고색창연한 문화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 정대임을 기려 세워진 창대서원, 조양각에서 약 200미터 정도 서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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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창대서원 일대는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당시 정대임 의병장이 적장 법화의 목을 벤 곳이다. 수십 명만 간신히 경주 쪽으로 달아나고 나머지 적병들은 그날 이곳에서 모두 죽었다. 싸움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법화는 어쩔 수 없이 절벽을 뛰어내려 목을 의병장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광경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영천성을 되찾은 뒤 경상도 일원 백성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난 웃음꽃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지금도 조양각 일대와 남천이 어우러진 풍경은 오로지 아름답지 아니한가.
▲ 영천시 창구동 1번지의 조양공원에는 '대장 정공 양세 순국 기념 산남 의진비'가 있다. 조양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수복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로, 정몽주가 세운 조양각 (중건) 건물 주변이 성의 남문 일원으로 추정된다. 그런 역사적 의미가 깃든 이곳에 구한말 의병장 정환직 부자 등 산남의진을 기리는 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할 일이다. 비석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영천?영일?청송 등지를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강력한 대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정환직?정용기 부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 선열들과 무명 의병들의 넋을 기리고 이들의 숭고한 구국 정신을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33-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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