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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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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 거북선을 몇 척만 만들었을까 [아산 현충사 꼼꼼하게 둘러보기 ②] 거북선의 역사, 구조, 크기 등을 알아보다오마이뉴스 정만진 입력 2017.01.09 11:13
▲ 이순신이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던 여수 선소 유적. 국가 사적 392호로 지정되어 있다. |
ⓒ 정만진 |
실물 거북선은 아니지만 모형을 복제해서 바다 위에 띄워둔 체험관도 물론 여수에 있다. 돌산공원 아래 한려수도 선착장 바로 옆에 가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거북선 한 척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모형은, 그 크기를 볼 때, 임진왜란 당시의 것보다 규모가 큰 조선 후기 거북선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들어가면 거북선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거북선의 역사, 구조, 크기, 왜 많이 만들지 않았을까, 누가 탔을까 등등 평소 알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글로 쓰여 게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것과 종가에 보관되어 온 것 등 거북선 그림들도 볼 수 있다. '거북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이순신인즉 현충사의 충무공기념관이 귀선(龜船)에 대해 각별한 전시 성의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북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현충사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은 <태종실록>에 실려 있다. <태종실록> 1413년(태종 13) 2월 5일자의 '임금이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15년(태종 15) 7월 16일자 <태종실록>에 귀선은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거북선이 그 이후 계속 만들어져 왜구를 물리치기 위한 전투 등의 실전에 사용된 적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전라좌수영 귀선(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 현충사 |
4월 12일이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이다. 즉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거북선이 1592년 2월 전에 완성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화포 사격 연습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미 완전하게 준비된 거북선을 갖춘 채 실전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바로 전날 거북선 대포를 점검한 이순신
물론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이는, 대포를 쏘는 화력(火力), 배의 속도, 탑승자들의 안전도 등에서 확인된 거북선의 장점을 되살려 향후 해전에 계속 활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거북선의 뛰어난 장점에 대해서는 이순신 본인도 당포 해전 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일찌감치 언급한 바 있다.
"신은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적병들이 우리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적선 수백 척 속에서도 쉽게 돌진하여 포를 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통제영 귀선(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 현충사 |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임진왜란을 실패로 끝낸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그들 수군의 패배에 있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중략) 조선 수군의 총수로 활약했던 이순신이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차지하는 위대한 전공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의 휘하에서 악전고투를 계속했던 수많은 수군 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그들의 희생 그리고 수군의 전쟁 준비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전의 군사들 못지않게 고통을 치렀던 연해 지역 민중의 희생을 빼놓고 말한다면 성웅으로 극대화한 이순신의 전공은 결국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거북선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신비화는 도리어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반작용으로 돌아온다는 지적이다.
▲ 이순신 종가에 전해져 온 거북선 그림(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 현충사 |
<신편 한국사>는 또 '종래 해전승첩의 주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 거북선의 위력이란 것은 사실과 달랐다. 우선 그것은 모두 3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장갑선(裝甲船)이란 점에서 사수(射夫)들이 전투하는 데에 불편하였으며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하여 사상자도 많았다. 만일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하였다면 정유재란 이전 휴전기에 단 한 척이라도 더 건조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명량해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것의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물론 거북선이 무용지물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롯이 거북선 덕분에 이순신의 수군이 계속 일본 전함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한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 되는 뜻이다.
그래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의 게시물 '거북선(龜船)'도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만들어 일본군을 쳐부순 배로서 해전이 시작되면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 싸운 일종의 돌격선이었다. 당시 거북선의 맹활약은 조선 수군의 승리에 큰 요인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꼽히고 있다.'라고 해설한다. 유의할 것은, 거북선 덕분에 이순신이 이겼다고 표현하지 않고, 거북선의 맹활약이 조선 수군의 승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뛰어난 작전 능력, 판옥선의 우수함, 일본군의 그것을 압도한 대포 등 화포의 수준, 수군과 의병 그리고 바닷가 어민들의 결사항전, 지형에 대한 익숙함,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오직 거북선만이 수군 승전의 1등공신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은 이순신의 위상을 오히려 낮춰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전남 여수 한려수도선착장 옆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선 모형관 |
ⓒ 정만진 |
기대보다 거북선의 수가 훨씬 적다. 거북선을 왜 그렇게 조금만 만들었을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게시물은 '①조선 수군의 주역 전선은 판옥선이었으며 거북선은 적진을 교란시키는 돌격선이었다. 돌격선이라는 배의 성격상 많은 수가 필요하지 않아 적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거북선은 덮개를 덮음으로써 공간이 좁아져 군사들이 활동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이 점도 거북선을 많이 만들지 않은 한 요인으로 추정된다.'라고 대답해준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적게 건조한 까닭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문헌도 없지만, 거북선의 크기와 구조에 대해서도 판옥선과 크기가 같다는 점과, 덮개를 덮은 구조와 포의 수 정도만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치수 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저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던 당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에 있던 거북선의 규격을 적어둔 것이 '귀선도설'에 나올 따름이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길이 30m 이하, 너비 8m 미만 크기
장학근은 이순신의 거북선이 길이가 30m 이하, 너비가 8m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추정한 근거의 한 가지는 <영조실록> 1751년(영조 27) 2월 21일자 기사이다. 박문수는 영조에게 "충무공 이순신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습니다.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졌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뢴다. 포혈(砲穴, 대포를 쏘는 구멍)이 8개인 영조 때 거북선이 길이 34m, 너비 10m였으므로, 6개인 이순신의 거북선은 길이 25.4m, 너비 7.6m가 된다는 추정이다.
따라서 영조 때의 거북선에 노군 80-90명, 전투원 약 50명, 그 외 약 20명, 합계 150여 명이 승선했다면 이순신의 거북선은 돌격선답게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노군도 50명 정도였을 것이다.
▲ 이순신 종가에 전해져 온 거북선 그림(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 현충사 |
이윤룡은 '전 현령 나대용이 (중략)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신이(중략)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건조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槍船)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했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중략) 만일 다시 이 배를 만들도록 하여 높고 낮은 여러 장수에게 각기 1척씩 맡긴다면 배 숫자는 전보다 배나 되지만 사수와 격군은 더 늘지 않아도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하략)'라고 상소하였다고 전한다.
본래대로 작은 거북선을 만들자는 나대용의 건의
나대용의 의견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10년가량 지난 지금(1606년)에 만들어지고 있는 거북선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만들어서 사용했던 본래 크기의 거북선이 전쟁 때 돌격선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며, 그래서 자신은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창선을 새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운룡은 '신(이운룡)이 임진년부터 이후로 수전(水戰)에 종사하여 전선의 모양에 대해서는 정묘하게 강구해 보지 않은 것이 없으나 창선의 제도는 일찍이 시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격군 42명을 채워 싣고 바다를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한다면 선체가 협소하여 좌우에 방판(防板, 방어용 방패)을 설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방판을 제거시켜 버리면 시석(矢石, 화살, 총탄)을 막을 수 없어 전투에 임해 손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며 부정적 의견을 밝힌다.
▲ 여수 거북선모형관 내부의 모습 |
ⓒ 정만진 |
거북선을 타보려면 여수 '거북선 모형관'으로
따라서, 오늘날 거북선이 보고 싶으면 '여수 한려수도 유람선 선착장(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22)' 옆에 띄워져 있는 <거북선 모형관>으로 가야 한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으니 거북선 실물을 타볼 수 없다면 실물 크기의 모형에는 한번 올라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뜻에서, 현충사 뜰에 거북선 한 척을 띄워놓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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