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침략한다"고 본 선조 城 신축하며 미리 대비했지만 전투력 안 키운 육군 잇단 패배… 승리 의지도 없어 달아나버려 軍備와 승전 의지 함께 갖춘 충무공은 거듭된 大捷 일궈내
"임진왜란은 준비 전혀 없이 맞았고, 그래서 초전에 그처럼 처참하게 박살 났던 것"이라고 많은 이가 생각한다. 선조 23년에 통신사 사절단의 부사로 일본에 갔던 동인(東人) 김성일이 돌아와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을 믿고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절박한 위기감을 갖고 전쟁에 대비했다. 유능한 무장들을 최전선에 배치하려 노력했고,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남쪽 지방 성들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도록 강력히 조치했다. 류성룡은 당시 상황을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뒤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변방 사정에 밝은 사람을 뽑아서 남쪽의 삼도(三道:경상·전라·충청)를 방비하게 했다. 경상감사에는 김수, 전라감사에는 이광, 충청감사에는 윤선각을 보내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했다. 삼도 중에서 경상도에 성을 가장 많이 쌓게 했다.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중수하게 했다. 이때 국가는 오랫동안 승평한 세월이 흐를 때였다. 안팎이 모두 편하게 사니, 백성은 자연 노역을 꺼려서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선조실록에는 좀 더 상세한 기술이 나온다. 임진왜란 발발 2년째였던 선조 26년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그때까지의 전쟁 상황 일체를 보고하라고 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작성해 명나라에 보낸 보고문에 전쟁 발발 전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순찰사 김수를 경상도로, 이광을 전라도로, 윤선각을 충청도로, 순변사 신립과 이일을 경기도와 황해도로 보내 군정(軍丁)을 점열(點閱)하고, 군기(軍器)를 수조(修造)하며, 성지를 손보아 고쳐 쌓게 했습니다. 경상도는 전에도 적의 침략을 받았던 땅이므로 부산, 동래, 밀양, 김해, 다대포, 창원, 함안 등지의 성을 증축하고, 참호도 깊이 팠습니다. 내지의 성이 없는 곳들, 이를테면 대구부, 청도군, 성주목, 삼가현, 영천군, 경산현, 하양현, 안동부, 상주목 같은 곳은 모두 백성을 징발해 성을 쌓았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윤1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