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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코스7 (사천 선진리성)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3-27

조회 1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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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선진리성 (泗川 船津里城)


사천은 삼한시대에 사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그만 나라였다. 이후 사천은 신라 나해왕 때 사물현이 된다.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사천시로 통합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 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東岸)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土築)으로 된 창성(倉城)이다. 이 창성은 본래 서남북의 삼면이 바다에 임하고 동쪽 일면만 육지로 통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은 모두 농경지로 변하고 서쪽 일면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고지 일부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은 왜성(倭城)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사천지역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이었던 모리길성으로 하여금 성을 구축했다는 일본측 기록 즉, 도진가기(島津家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우리의 관계문헌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을 고찰해 보면 결코 왜성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성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보면, 고려초 남도수군(南道水軍)에 설치한 12조창 중의 하나인 통양창이 자리한 곳을 조창이 설치될 무렵 이 곳의 지명을 통양포 또는 통조포라 하였다.


이어 조선초기에는 통양포가 다시 통조포로 변했는데 조창명도 이에 따라 통양창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이때가 태) 3년(1403)의 일로서, 이후 통양창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조운이 폐지되고 조세 운송은 육로로 전환되었다.


임진란 이후 선조실록에는 이곳의 지명을 법질도, 선창,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동양창(東洋倉) 따위로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은 전사(傳寫) 과정에서 음운상과 통양(通陽)과 통양(通洋)의 오사(誤寫)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사천(泗川) 고성(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 후기에는 수군의 진보인 전선소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구한말 때는 화계(花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연포동(蓮浦洞), 통양동(通陽洞) 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의 이름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시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으로서 선조 25年(1592) 5月 29日 함선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을 떠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선진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한 싸움 끝에 적선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 해전이며 이때 해전 사상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하였다.



사진 출처 : 이순신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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