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호방조제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올라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게바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 있는 게바위는 현충사와 더불어 이순신장군의 자취가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즈음,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장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자 왜군은 이순신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첩자였던 요시라를 통해 가토가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시켜 사로잡으라는 허위정보를 조정에 흘렸다. 장군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조정의 명령에 따라 출동했으나 거짓정보인 까닭에 가토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조정은 정보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 다만 가토를 사로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됐고, 왜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지만, 그러한 공로에 아랑곳 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면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 막하의 백의종군을 하게 돼었다.
백의종군을 위해 남해안으로 향하던 중, 장군의 투옥소식을 접한 노모(당시 87세)는 장군을 만나기 위해 여수에서 올라오시다가 그만 태안 근처에 이르렀을 때 뱃전에서 운명하고 만다. 백암리 옛집에 도착해 있닥 어머님의 부고를 접한 이순신 장군은 바로 이곳 게바위로 달려와 어머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백암리 옛집에 어머님을 모시고 장례를 논의하던 도중, 금부도사의 재촉에 의해 더이상 진행을 못하고 남행을 떠난 이순신 장군은 옛집을 뒤돌아 보며 통곡을 하면서 떨어짖 않는 발걸음을 떼 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도중에 여러 고을을 들렀다. 한양에서 출발해 해가 저물면 그 지역에서 하루 묵었다가 이튿날 진행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이상 묵은 지역이 없다. 그러나 성장지이자 옛집이 있는 아산에서만은 15일간을 묵었다. 그중에서도 어머님의 시신을 모신 해암리 게바위에서는 3일을 묵었다. 따라서 이 게바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머님에 대한 애끓는 효심이 깃든 유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순신 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