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실천하는 이순신 포럼

충무공 이순신 > 온라인 유적지 탐방

조령/탄금대(신립장군) 코스1 (문경새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3-28

조회 24,354



문경새재 등산로.jpg

문경새재 1관문.jpg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 1관문 과거 길.jpg



문경새재 2관문.jpg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

문경새재 3관문.jpg

문경새재 제3관문 (조령관)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을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문경새재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 초기 새재 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후삼국 역사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설화들이 남겨진 이곳은 우리땅에국가가 형성딘 이후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중요한 요충지였다.

문경과 괴산, 충주르 연결하는 국도가 개통된 지금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옛 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조령산과 주흘산을 넘어가는 길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세 관문으로 가로막혔다.
임진왜란 당시 관문 하나 없이 무방비로 충주까지 왜군을 통과시켜 한양을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했던 새재 길은 이후 굳건한 성벽을 쌓아 방비하였으나 다시 이곳을 통과하려 했던 외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중요한 통로였고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간문이었던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의 길은 6.5km 이다.

문경새재는 옛날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백두 대간을 넘나드는 3개의 고개 중 으뜸으로 칠 만큼 중요한 교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한양길에 오르던 영남 선비들이 장원 급제의 희망을 안고 넘던 장원급제길이었고, 조선 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나들 수 있던 길이여서 지체 낮은 서민들이 꼭 한번 걸어 보고 싶은 동경의 길 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신립장군이 이곳에서 왜군을 막지 못해 천추의 한을 남긴 길이기도 하며, 근세에 들어서 반봉건 반외쇄에 대한 항쟁이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이며, 더불어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도들이 넘어야 했던 한 많은 길이기도 하였다.

총 길이 10km인 문경새재는 외침에 대비하여 세 개의 관문을 두었다. 그 중 제 2관문인 조곡관이 제일 먼저 세워졌다. 옛날의 하늘재 길을 대신하여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관로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훗날엔 양반세력 뿐만 아니라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 역시 이 길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지다 보니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폭 1m내의 소로에 불과하였던 것을 잦은 외침의 영향으로 이 곳을 군사적 교통 요충지로 인식하여 총 길이 10km의 새재 고개내에 선조 27년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시작으로 세 개의 관문을 두어 관방(關防)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추천메일 보내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