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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코스3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4-09

조회 1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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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閑山島 李忠武公 遺蹟)


위치 :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            지정현황 : 사적 제113호

한산도의 이충무공 유적지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제승당 일원의 525,123㎡(159,128평)에 조성된 지상건물, 각종 비석, 동산문화재 광장, 조경물 등과 풍치림야를 통칭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충무공은 좌수영 함대를 이끌고 그해(1592) 5월 4일 1차 출동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대승하고 5월 29일의 2차 출동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궤멸시킨다. 이어 7월 4일 제3차 출동에서 세계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대승첩(7월 8일)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한산대첩으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어 8월 24일의 제4차 출동에서는 부산포에 집결해 있는 일본함대 1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선조는 1593년 8월에 이충무공에게 당시 편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고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괄 지휘케 하는데 이 무렵 이충무공은 한산도에 진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한산도 두억개에 터를 고르고 진영을 설치하기를 정유년(1597) 2월 26일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3년 7개월 동안 하였는데 운주당을 비롯한 각종 공해, 창고와 부대시설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는 문헌상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난중일기 시조 및 한시 등이 전하는데 그중에서도 이 한산도에서 어느 날 밤, 달을 보며 읊었던 "한산섬 달밝은 밤에"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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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량묘 (鑿梁廟)


위치 : 경남 통영시 당동                            지정현황 : 기념물 제13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전란이 끝난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 수군들과 이곳 주민들이 공의 충절과 위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판도가 바라보이는 착량 언덕에 초옥을 짓고 공의 위패를 모시어 춘추향사와 기신제를 모시었으니 이것이 이충무공 사당의 효시이다. 그 후 고종 14년(1877) 공의 10세손 이규석 제198대 통제사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으며 이때 호상재도 같이 지어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착량묘는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되자 그해부터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화사업을 벌여 동재와 고직사, 외삼문, 일각문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기둥머리에 포작을 두지 않은 매우 검박한 형식의 건물이다.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장대석기단과 원형정평주초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74년 개축시에 만든 것이다.  


서재는 2칸의 마루와 한 칸의 방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본래 강학용의 건물이거나 향사를 준비하는 용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재는 서원의 양식을 갖추기 위해 일부러 축조한 것으로 보이나 건물형식이나 건축법식상 호상재와 차이가 많다.


착량묘는 현재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음력 11월 19일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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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洗兵館)
위치 :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1              지정현황 : 국보 제305호 지정

세병관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옮겨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단 올려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이지만, 익공식 수법과 다포식 수법이 많이 보인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직접 화반을 놓아 주심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십일량가로서 대들보를 양쪽 내고 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내고주와 전면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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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룡포 기사비 [頭龍浦記事碑]

두룡포기사비는 세병관 경내의 수항루 뒤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으며
제19대 통제사 구인후가 세웠습니다.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朴弘美)가 지은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慧眼)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순신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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