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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한산대첩 코스2 (한산대첩,학익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5-21

조회 19,169



한산도대첩.jpg


한산대첩 (閑山大捷)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선창(泗川船艙) · 당포(唐浦) · 당항포(唐項浦) ·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 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학익진.jpg
학익진 (鶴翼陣)

조선 수군이 즐겨 쓰던 정(丁)자 타법을 개량한 것으로 학이 날개를 펴듯 적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진형이다. 학익진은 기본적으로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도록 하고, 아군은
횡대가 되도록 배치하는 형태에 적을 감싸 안듯 양 날개가 휘어진
배치가 된다.
이런 배치는 아군의 포격 유효 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이순신이 이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을 때, 이에 당하기만 했던 10여만 이상의
왜군들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패전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전술의 원리를 일본이 알아낸 것은 300년이나 지난 후였으며, 이순신 이후
대략 이때쯤까지 전 세계의 해전은
계속 접현전으로 일관해왔다. 즉 이순신은
이순신 이후 가장 빨리 이 전술을 고안한
사람보다 300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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