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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교성전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9-29

조회 12,838



순천왜교성전투!

1598년9월21일(癸卯).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종일 싸웠으나
물이 너무 얕아서 진격할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가볍고
빠른 배를 타고 들어와 정탐하려할 때,허사인(許思仁) 등이
추격하였더니 적들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배와 여러가지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도독(陳璘)에게 바쳤다.

1598년9월22일(甲辰).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서로 싸우다가
유격(遊擊 : 季金)이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 중상은아니었다.
명나라 군사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고 지세포(知世浦)
만호도 탄환에
맞았다.

-박기봉 편역[충무공 이순신 전서] -에서 발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적들은 철수하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쳐들어와서 온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철수한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 입니다. 한 놈도 살려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노량해전의 전초전이기도 한 순천왜교성전투는(1598.9.20 ~10.7)
참전국 3국이 얼키고 설켜 싸운 격전 입니다. 조.명
수륙연합군의
합동작전의 중요성과 외교의 현실성을 일깨워
주는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본래 유정(劉綎)의 육군과 합동으로 공격하기로 했던 것인데,
유정이 공격하지 않음으로서 수군 단독으로 싸웠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수군의 전시작전권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매번 도독의
제재를 받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는 급보를
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또한 왜적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유정 제독과 진린 도독에게
뇌물을 주고 길을 열어달라 협상을 했으며 그 결과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가 지원하러 오게 되며 이순신 장군은
협공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렇듯 전쟁은 그냥 전쟁터에서 군인들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끊임없는 외교 협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지키는 것 입니다. 이순신장군의 안타까운 심정이
절로 묻어나는 일기 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처해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동복아3국의
외교적인 문제해결과 만일 전쟁이 일어났을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순천왜교성전투를 통해서 배우고 준비했으면 합니다.

어제 대한민국 해군의 안보현장과 박근혜 대통령 별장을 견학
하였습니다. 다시금 임진왜란의 참혹했던 상황을 되새겨보며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해권을 사수하고 있는 해군 장병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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