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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왔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12-01

조회 21,383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왔다.


1597년11월17일(甲辰).
비가 계속 내렸다.양경리(楊經理)
양호의 차관(差官)이 초유문(招諭文)과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왔다.

- 노승석 옮김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 에서 발췌


초유문은 적 또는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포고문이고 면사첩은 사형을 면하게 해주는 증명서 입니다.
위의 짧은 난중일기만으로는 명나라에서 이 면사첩을 보낸 의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그 수여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선조임금이 이순신 장군에게 명량대첩에
대한 포상으로 내려주신 것 처럼 방영되어 울분을 금치 못했습니다만
면사첩 제도는 본래 중국의 제도로서 조선에는 없던 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조실록 선조30년(1597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면사첩은
왜인들이 만든 것으로 조선인을 붙잡아 남자는 쌀 5말,여자는 쌀
3말을 받고 이 첩을 주었는데, 여기에 "소서행장의 병영에서 부역
하니 죽이지말라."고 쓰고 그들의 이름도 써넣었다고 합니다.

아뭏든1597년11월16일의 일기에 ....명나라 장수 양경리(楊鎬)는
이순신에게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천을 걸어
주는 예식을 거행하고 싶으나 길이 멀어서 못 간다." 라고 쓰신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에게 면사첩을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만 죽어납니다. 오죽하면 면사첩이라도 받고
목숨을 이어가려고 하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치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리더의 책임있는 의사결정의 덕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경제전쟁시대에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고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잘 활용하여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지도층에
계시는 리더들은 국민의 충실한 팔로워로서 어느 누구에게서도
면사첩 따위는 받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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