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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전투에서 배우는 쓰라린 교훈!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12-07

조회 21,620



용인전투에서 배우는 쓰라린 교훈!

연려실기술 -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 선조 수정실록 6월

광교산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기 위해 불을 피워 연기가
올라갈 때, 적의 기병대가 산골짜기를 들이닥쳤다.
선봉의 왜군 5명은 얼굴에 쇠탈을 쓰고,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둘렀는데, 선봉의 충청병사 신익(申益)이 그것을 보고
도망치자, 군졸들도 덩달아 도망을 치는데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 적의 기병 두어 명이 10리나 쫒아
오다가 되돌아갔다. 전라감사 이광,경상도순찰사 김수,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은 30리 밖에 있었는데 이들도 군사를
수습하지 못하고 도망을 가니 5만여 명에 이르는 남도근왕군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 윤인식 글 [역사추적 임진왜란] - 에서 발췌

어제 이순신포럼의 [2014 이순신 장군과 함께하는 불우이웃
돕기 자선산행] 행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에
추운 날씨였지만 아무탈 없이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제 모은 기부금은 수지 성심원의
성심원 원생들을 위해서 기부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오산 독산산성을 시작으로 매년 12월의 첫번째 토요일은
임진왜란 육전의 전적지를 답사하며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자선 산행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 입니다. 해전과 달리 육전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고 밀렸던 조선 관군들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올해는 용인전투가 있었던 수원 광교산을 답사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20여일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 되자 국왕은 평양으로
피난가고 있는 상태에서 왜적에게 빼앗긴 한양성을 되찾기 위해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의 각 군현에 명령을 내려 4만명을 모집하여
경상도순찰사 김수, 충청도순찰사 윤선각과 함께 온양에 집결하여
6월3일에는 수원 독산성에 입성 합니다.

이에 놀란 왜군은 용인으로 도망가고 그 뒤를 밟아 이광이 먼저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군은 한양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원병과 함께 불과 1,600명의 군사로 기습공격
하였습니다.

이에 선봉장 백광언과 이지시가 총탄에 맞아 죽자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광교산으로 후퇴하고 그 다음날 아침 왜군의
척후대가 기습공격하자 5만명의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왜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기마대는 현재의 경기대학교 후문의
기슭을 타고 내려와 광교산 일대의 조선군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조선 관군이 주둔했던 상광교 13번 버스종점에서 시루봉
까지 올라가서 보니 역사의 현장은 아담한 분지로 되어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보였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목
아니면 서울을 방어하는 제일의 관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척후병도 안보냈는가? 광교산으로 후퇴하였다면 작전
회의는 하지 않았는가? 훈련 안된 백성들로 구성된 군대(민병대)로
정규군인 왜적과 전쟁을 치룰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전쟁을 수행할
조직은 갖추어져 있었는가? 5만명을 통솔할 책임있는 리더는 있는가?
정보 수집은 제대로 했는가? 등등의 의심들이 꼬리를 뭅니다.

역사책에 아주 조그맣게 소개된 용인전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오합지졸의 수치스러운 전투를 잊으면 잊혀집니까?
두 번 다시 이런 경우를 만나지 않으려면 뼈를 깍는 아픔으로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유성룡 대감이 징비록을 쓴지 40년도 안되어
병자호란때 쌍녕전투가 같은 장소에서 용인전투와 똑같은 양상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역사를 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현재를 타개해 나갈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라." 며 어릴때부터 역사 교육을
시키는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교육방법도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a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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