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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하였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08-09

조회 12,211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하였다.


1597년 8월 9일(丁卯).
맑다. 일찍 떠나 낙안(樂安 :
승주군 낙안면)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5리나 나와서
환영 하였다. 도망가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들
하는 말이, 병사(兵使)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겁을 먹고는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기 때문에 그래서 인민(人民)
들도 흩어져 도망간 것이라고 하였다.
군(郡)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의 곡식들이 모두 다 불타버렸다.
관리와 촌민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와서 보았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이들이 길 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하였다.
저녁에 보성(寶城)의 조양창(兆陽倉 : 오성면 오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나 창고의 곡식은 봉해진 채
그대로 있었으므로 군관 4명을 시켜서 수직(守直)하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는데,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을 가고 없었다.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積)과 김제 군수
고봉상(高鳳翔)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칠천량 패전의 뒷수습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씁쓸합니다. 재차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은
받았으나 무엇하나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순신 제독께서 난중일기를 쓰셔서 대단한 위인이라기
보다는 난중일기에 나타난 그 분의 마음 씀씀이, 일의 처리
방법들,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에
우리가 감명받기 때문에 성웅으로까지 평가 하고 멘토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정유년의 8월, 서쪽으로 서쪽으로 후퇴하면서도 남해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 눈물겹습니다.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백성들이 장군이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며 진정한
마음의 선물을 바치는 장면은 가슴 뭉클합니다. 이순신을
따라 나서면 살 길이 있다며 조선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사들이 군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놀라서 도망가는 모습은 기업을 영위하는 지금의 기업인들이
참고해야 할만한 사항 입니다.

왜 부산포를 진격 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정유재란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핞은 상황
이라도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난중일기를 통하여 배웁니다.

정유년의 일기에 그 어느곳에서도 선조임금이나 조정대신들을
원망하는 글귀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다가 올 차기 전투를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골몰하는 고놔가 절절히 쓰여진 일기를
읽으며 이순신 제독의 고매한 인격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일이 닥쳤을때 [어떻게]가 매우 중요 합니다. 방법을 찾아내어
솔선수범하는 자세, 오늘날의 기업인들에게 들려주는 메세지
아닐까요. 정부의 지원금, 정책, 등에 기대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십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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