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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 전투와 수륙병진합동작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10-05

조회 11,984



왜교성 전투와 수륙병진합동작전!


10월2일(甲寅).
맑다. 오전6시경에 진군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건너가 정오까지 싸워서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 첨사(黃世得)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李淸一)도 죽고....제포(薺浦)
만호 주의수(朱義壽)와 사량 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 현감 유형(柳珩), 진도 군수 선의경(宣義卿),
강진 현감 송상보(宋尙甫)는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10월3일(乙卯). 맑다. 진(陳璘) 도독이 유(劉綎)
제독의 비밀 서신을 받고 초저녁에 나가 싸워 자정에
이르기까지 적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배인
사선(沙船)19척 , 호선(號船) 20여 척이 불탔다.
도독이 엎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안골 만호 우수(禹壽)도 탄환에 맞았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왜교성 전투는 1598년 9월20일부터 10월7일까지 조선의
권율, 이순신 그리고 명나라 유정과 진린등 조.명연합군의
수륙연합작전으로 치러진 노량해전의 서전입니다.

조선군과 함께 명나라 마귀의 동로군은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동일원의 중로군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서로군의 유정은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목표로 편성되어 동시에 남하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수로군으로 편성하여 서로군과 함께 왜교성을 공격
하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하였지요.

서로군의 유정이 도원수 권율과 함께 육지에서 왜군을
바다로 몰아내면 수로군의 진린은 이순신과 휘하 조선
수군과 함께 왜군을 섬멸하는 수륙병진합동작전입니다.

그러나 10월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던 명나라 유정의 치졸하고 저급한
작전으로 인하여 전쟁은 왜군을 완전히 격퇴시킬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대명제국의 무장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으로 전시군사작전권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발만 동동
구를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해온 왜군을 명나라의 손을 빌어 쫓아낸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속터지는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였습니다. 조선군은 목숨을 바쳐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명나라 군사들은 손실을 최소화 하고 강화협상을 통해 작전을
종결하려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적의 탈출을 봉쇄하고 섬멸하려는 조.명엽합군의 합동작전은
명나라 유정의 비겁한 태도 인하여 물거품이 되고 한사람도
살려 돌려 보내지말라는 이순신의 정의의 전쟁, 노량해전은
시작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합동작전의 중요성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전투를 개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합동작전을 믿고
전투력을 결집시키고 극대화 되도록 최선을 다하여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합의된 합동작전의 명확한 작전
목표 및 수행절차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합국 당사자들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함은
물론이거니와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협력하는 성실한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계2차대전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6.25 사변때의
인천상륙작전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지금은 창조융합의 시대이고 창조경영을 해야 한다고 가는 곳
마다 세미나 열풍이 대단합니다. 왜교성 전투에서 배우는 교훈
한 두가지가 아닌것 같습니다.

비록 전쟁중이라 할지라도 서로 성실하게 배려하고 믿음으로
목적이 하나로 통일 될 때 비로써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으며
달성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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