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
제독 이여송은 혜음령을 넘어 벽제관을 지나, 여석령 (礪石嶺)에 도착하였다. 이때 여석령 고개 위에는 500명의 왜군만이 있었다. 소규모의 왜군을 발견한 제독 이여송은 자신감을 얻어 여석령을 향해 진격을 했고, 곧이어 고개 뒤에 있던 왜군 본진이 갑자기 나타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제독 이여송은 뒤늦게 도착한 좌협대장 양원의 지원병력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파주로 무사히 퇴각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는 이비어, 마천총, 이유승 장군 등을 잃었다.
- 윤인식 글 [역사추적 임진왜란] - 에서 발췌
이 제독이 파주에 진군하여 적군과 벽제관(碧蹄館) 남쪽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개성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중략) 날이 저물자 제독은 파주로 돌아와서 패전한 것을 숨기고 있었으나 신기(神氣)가 몹시 저상(沮傷)했으며 그날 밤에 가정(家丁)의 친신(親信)한 사람들이 전사한 것을 슬퍼하여 통곡까지 했다. (후략)
- 서애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징비록] - 에서 발췌
어제 벽제관 전투가 있었던 여석령으로 해서 벽제관지까지 고양시 덕양구 일대의 전적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제6회 이순신포럼 불우이웃돕기 둘레길 걷기명상으로 마련된 의미있는 임진왜란 유적지 답사였습니다.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퇴각하는 왜적들을 뒤쫒아 일거에 물리쳐 버리려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1만명 이상이나 되는 명나라 군사들을 잃고 뒤돌아선 이여송 제독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겠지요.
유성룡 대감은 또 어떠하였겠습니까? 임진강을 건느도록 칡넝쿨을 엮어서 부교를 만들어 어렵게 길을 터주고 군량과 마초를 마련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온갖 고초를 다 당하시면서 애쓰신 노고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한글, 금속활자, 거북선, 부교를 꼽았는데 그 부교가 바로 유성룡 대감이 만든 임진강 부교입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
이여송에게서 배웁니다. 지원군이라는 거만함에서 오는 교만함과 적을 얕보는 태도에서 오는 정보수집능력의 태만함 등에서 실패의 리더십을 배웁니다.
조선을 방패로 삼아 자국의 전쟁피해를 최소화 하려는 명나라의 속셈을 온 몸으로 막아 내야했던 유성룡 대감을 비롯한 충신들의 나라사랑 언행에서 지금도 통용되는 협상의 리더십을 배웁니다.
이여송이 조선으로 파병 되면서 전시작전권도 행사할 수 없었던 조선은 또 하나의 다른 적을 맞이하였습니다. 왜적보다도 더 무서운 외교전쟁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신 선열들의 피땀어린 희생의 노고에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징비록을 남기시면서까지 국가의 안보를 경계 하셨건만 300년후에 나라를 다시 그 왜적에게 빼앗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여 다시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가던 길, 선조임금이 피난 가던 길, 대륙의 문명을 받아들이던 길, 그 길은 두번 다시 치욕의 길을 만들면 안된다고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리더로서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길, 수출로 이어지는 한류의 길, 분단된 조국을 통일로 이끄는 번영의 길로 쭉쭉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길 입니다. 아시아 최정상의 그 길로.....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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