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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1-04

조회 12,293



울산성 전투!!

도산(島山城)에는 물이 없어서 적병은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와 물을 길었다. 경리가 김응서에게 일러 용사를
거느리고 성 밖 우물가에 매복해 있다가 매일 밤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적병은 굶주리고 지쳐서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저절로 무너질것이다."
하였다. 이때 일기가 몹시 춥고 비가와서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졌는데, 조금 후에 적군이 육로로 내원(來援)하자
경리는 적군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서 갑자기 군사를
돌이켰다. 정월,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중국 수도로
돌아가서 다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 이재호 옮김 [서애 유성룡 징비록] - 에서 발췌

1597년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명나라도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사로병진정책으로 전쟁을 가능한한 빨리 끝내려고 하지요.

서로군은 순천왜성(고니시군)을, 중로군은 사천 선진리성
(시마즈군)을, 동로군은 울산왜성(가토군)을,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진린도독으로 하여금 수로군을 편성해 일시에 왜적을
추격해 전멸 시키는 총공격을 하는 전략 입니다.

동로군인 명나라의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 그리고 조선의
권율 장군은 약 5만여명의 조.명연합군을 편성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방어하고 있는 울산성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1597년 12월21일부터 보름동안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울산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기습공격으로 왜적들은 도산성에
고립되어 굶어죽게 되자 가토기요마사는 자살까지 시도하였고
그의 항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1598년1월4일 갑자기 후퇴한 명나라군은 자국의 전쟁이었다면
대책없이 후퇴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정말 조선을 도우러온
구원병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로병진정책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들은 하나같이 비겁하고 용감하지 못했으며 지휘
체계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노량해전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도독의 수로군에서만 승리 하였습니다. 왜교성 전투에 이어
노량해전을 치르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설득의 리더십에서
우리는 너무도 배울점이 많습니다.

선조임금를 설득시키고 진린도독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피눈물
나는 굴욕을 참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절절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죽음으로 지켜낸
조선입니다.

모두가 왜적들이 철수 한다고 하니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이라며
손을 놓고자 할 때 마지막까지 이 땅을 유린한 왜적들을 한 놈도
살려보내지마라는 정의에 불타는 이순신 장군의 결연한 의지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안보, 국방, 경제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국제적인 사안들이 많습니다. 나라가 평화롭게 풍요로울수록
미래를 대비하고 국익을 위한 유비무환의 리더십과 서로를 배려하고
설득하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되는 새해인 것 같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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