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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전투에서의 패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5-23

조회 11,887



임진강 전투에서의 패배..

선조실록 1592. 5. 23(壬午).  이양원(李陽元)은 이일(李鎰),
신각(申恪), 김우고(金友皐) 등과 함께 대탄(大灘)에 있었고
한응인과 김명원은 권징(權徵), 신할(申硈), 이빈(李薲),
이천(李薦), 유극량(劉克良), 변기(邊璣) 등과 함께 임진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싸우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때 군중의 어떤 사람이 건의하기를 "우리 군사가 많기는
해도 대부분이 지치고 약하여 믿는 것은 강변의 지방 병사들
뿐인데, 이들도 먼데서 왔기 때문에 지친 상태이다.  2~3일
지체하여 휴식하면서 힘을 저축해야만 거사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처음 약속이 행해지지 않았다.
17일에 밤을 타고 강을 건넜다가 좌위장 이천은 상류에서
적을 만나 패배를 당하였고, 유극량은 죽었으며, 신할(申硈)도
죽임을 당했는데, 적이 하류에서 군사를 숨겨 가지고 강을
건넜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한강을 사수하지도 못하고 물러선 김명원에게 다시 임진강을
맡기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못미더워서 한응인에게 도원수
김명원의 지휘는 받
지 말라는 명을 내리는 선조도 그렇고....
과연 국가최고지도자로서의 선조는 신(信)의 개념은 있는 것인가?

조선 침략군 제2군 가토기요마사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도착
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활과 조총을 쏘며
신경전을 벌이며 며칠을 대치 하다가 
5월23일경 갑자기 군막을
거두어 철수를 하기 시작하자 한응인이
즉시 추격을 명령합니다.

노장인 유극량이 적의 속임수일지
모른다며 반대를 했지만
작전 지휘권은 한응인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을
건너 갑니다. 
한응인은 문신인데 정여립을 고발한 공으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전투경험
부족에서 오는 미숙한 작전 지휘로 이미 
패배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매복하고 있던 왜군들의 조총과 반격에
임진강변의 깍아지른
절벽으로 모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조선의 1만여 군사들은
후퇴도 못하고 우왕좌왕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임진강 건너편에 있던 김명원과 한응인은 기가 꺽여 5월27일
평양조정에
귀환 했으며 조정은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전투에서는 
군신간의 신(信)도 없었으며 부하장졸간의 신(信)도
없었습니다.  방어선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양을 빼앗기고 의주로 몽진을 가는 상황에서 비전문가인
문신에게 군대를 맡기고, 스스로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선조의 인사정책에 과연 신(信)은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업이든 국가경영이든 조직과 상호간의 신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믿음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 이어 임진강 전투에서 배우는 실패의
리더십, 리더의 신뢰는 모든 전투력에 우선한다는 것 입니다.  
신(信)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 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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