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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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서울로 압송!!
1597년2월26일(丁亥).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포박되어
서울로 향한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병신년(1596) 10월 12일 이후부터 정유년(1597) 3월 30일
까지의 난중일기는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그의 구명운동을 위하여,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장 최근의 4개월분의 일기를 유성룡 대감에게
전달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회수되지 못하고 유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누락된 난중일기를 대신하여 그동안의 수군에 대한 사정과
조정 대신들의 논의, 장계 등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참고 하면서 421년 전의 오늘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597 2월 26일, 바로 오늘,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포박 당하여
서울로 잡혀 올라갑니다. 당시 이순신은 부산해역에 출전
중 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었을 때는 원대복귀하여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끝낸 뒤였습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7년 2월 4일 사헌부에서 이순신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고, 2월 6일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붙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2월 7일에는 수군
통제사를 원균으로 경질하라는 지시도 합니다.
선조실록 2월 20일에는 권율이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왜적
에게 속고 있는 것 같아 수상하지만 알린대로 보고한다는
급보를 올립니다. 또한 2월 23일에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싸움을 적과 상의해 가면서 하는 것 같아 괘상하기 짝이
없다는 급보를 연달아 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들까지
왜 이중간첩 요시라에게 말려 들어갔는지, 무슨 판단으로
부산포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새로 통제사가 된 원균이 계속해서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도 한 몫을 하였겠지만 결국은 왜적 요시라의 이간책에
넘어간 사람은 선조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고니시나
가토에 의한 것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있듯이 나라의 존망에 관한
전쟁을 치루면서 적으로부터 나온 첩보를 심사숙고 하지도
않고 믿었다는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 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순신은 왜적이 아닌 내부의 적에 의해 제거 당했으며
정유재란이라는 엄청난 국란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통제사를
교체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조선수군의 궤멸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고한 백성들은 왜적들의 무참한 칼날 아래 또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습니까?
리더의 잘못된 의사결정, 사실과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지
않은 독단적인 지시가 조직을 무너뜨리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 이라는 것을 우리는 임진왜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비록 무고로 인하여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였어도 정당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의연한 태도와 그리고 이순신을 아끼는
주위의 많은 진정한 휴먼 네트워크가 움직였다는 것은
이순신의 신뢰재(信賴財)였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1597년 4월 1일, 옥문을 나왔다." 로 다시 시작되는 난중일기는
28일간의 옥중 생활을 단 한마디의 변명도, 원망도 쓰지 않은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이순신의 인생관
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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