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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이 함락되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8-07-02

조회 20,393



진주성이 함락되고.....

1593년 7월 2일(甲寅).  맑다. 늦게 우수사(李億祺)가 와서
만나보았다.  선전관(柳珩)은 오후에 돌아갔다.  저물녘에
김득룡(金得龍)이 와서 전하기를, 진주성이 함락되고
황명보(黃明甫), 최경희(崔慶會), 서예원(徐禮元), 김천일
(金千鎰), 이종인(李宗仁), 김준민(金俊民)이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럴 리가 결코
없을 것이다.  필경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초저녁에 원연(元埏 : 원균의 동생)과 원식(元埴)이 와서
군중(軍中) 일들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했다. 가소로웠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1592년 10월에 있었던 1차 진주대첩은 김시민 장군의
철저한 전투 준비와 리더십, 진주 관군과 백성들의 합심,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 의병들과의 협력체계로 3,800명의
조선군은 30,000명의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명나라의 이여송이 참전하면서 평양성 탈환과 서울 수복
으로 왜적들로서는 참기 힘든 후퇴였으며 군량부족과
보급로가 끊긴 이상 대규모의 주력부대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병력의 1/3 이상을 잃고
처참하게 패배 하였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왜적들의
강화시기에 치루어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복수전으로
총 병력 9만3천명이 왜군들이 참전한 전투였습니다.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구원을 하지
않았으며 왜적들은 강화협상이 결렬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의 남쪽을 점령하려고 하는 의도까지 보이면서
결사적으로 덤벼들었습니다.

조선은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임금과 조정 대신들간의
의견 충돌과 진주성을 사수하려는 지휘체계에 혼란이
있었으며 명나라 군사나 외곽의 조선군과 의병들도 지원
하지 않은 전면전 이었기 때문에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왜적들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입은 병력 손실과
전력 약화로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했으며 호남 공략의
목적이 좌절 되어 본진이 있는 부산으로 돌아갔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은 6일 동안 10회 교전 모두 승리 했으며
2차 전투에서는 9일 동안 25회 교전 중  24승으로 마지막
한 번은 장맛비로 인한 동문 쪽이 허물어 지면서 성이 함락
되었는데 이것을 왜적들의 승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선군과 의병 전원은 이 운명적인 전투 결과를 알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사수하였고 로마시대 마사다 전투
처럼 함락이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참전하였으므로  2차 진주성
전투 결과를 패전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박희봉 지음 -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발췌)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과 독일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싸운 태극전사들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정신력
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원하는 리더십이요 팔로워십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진주성을 사수하고 명량대첩에서 끝까지
우리 바다의 제해권을 사수한 조선의 리더십을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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