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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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바라보았다.....
1596년 5월 15일(辛巳).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식후에 혼자 말을 달려 한산섬 뒷봉우리로
올라가 오도(五島)와 대마도를 바라보았다. 늦게
조그마한 냇가로 돌아와 조방장, 거제(安衛)와 함께
점심을 먹고 저물어서야 진으로 돌아왔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강화협상의 막바지에 이르러 명나라의 사신 이종성은
도망을 가고, 부산의 허내만의 편지, 김해부사 백사림의
급보 내용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화친을 맺고 철병
하고 싶어 한다고 하는 어수선한 시기였습니다.
매사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순신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는 치밀함을 보여주는데.......결국 이중간첩 요시라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선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어리석은
의사결정은 부산포를 치라는 임금의 출전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에 의하여 들통난 거짓정보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대마도는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지금도 부산이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해상 자위대가 버티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입니다. 고대로부터 왜구들의 소굴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동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에
맞서 일본 해군이 기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대마도의 오우라항에서 출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단 1만8천명 중에 대마도 도주인 소 요시도시가
이끄는 대마도 병력도 약 5,000명 정도 끼어 있었으며,
절반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소 요시도시는 1591년 대마도의 남쪽 이즈하라에
시미즈 산성을 쌓고 북쪽의 오우라항에는 전진
기지를 구축하며 전선을 건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마도의 모든 남자들을 동원하고도 모자라서
다른 지역의 죄수들까지 데려와서 조선침략군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대마도가 보여준 공격과 수비의 전쟁 준비를 보면서
이들도 전쟁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다 열어 놓고 준비하였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구의 소굴에 불과했던 대마도가 조선침략의 전초
기지가 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 남아 오늘날
중요한 군사기지의 요충지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요건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어떠한 환경
에서도 어떻게 준비하며 대응하느냐 하는 것 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조선과의 국교정상화에
앞장 설 수밖에 없었던 소 요시도시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우여곡절을 보면서 어떻게 하든 살아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대마도의
역사적 운명을 한 번쯤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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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우리의 섬 대마도에서 찾아보는 우리 역사의 파노라마에 초대합니다.
오는 5월 31일(금)부터 1박2일 대마도의 임진왜란 유적지를
둘러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 봅니다. 5월의 가족행사 다
마치시고 이번에는 나의 리더십을 재성찰해 보는 좋은 힐링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셔요. 일정표 검토 하시고 신청해 주
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이순신포럼 이사장 이부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