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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양(道陽)의 둔전을 살펴보았는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9-08-19

조회 19,232



도양(道陽)의 둔전을 살펴보았는데.....

1594년 8월 19일(甲子).  맑다. 새벽에 사량(蛇梁 :
통영군 원량면) 뒤쪽에 이르렀는데 원수사(元均)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칡을 60동(同)이나 캐고
나니 그제야 원수사가 왔다.  늦게 출발하여 당포
(唐浦)에 이르렀다.

1596년 윤8월 19일(癸未). 맑다. 출발하여 녹도
(鹿島)로 향하여 가는 길에 도양(道陽)의 둔전을
살펴보았는데, 체찰사는 무척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녹도에 이르러 잤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조정의 어떤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칡이라도 캐어 연명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노출
되었습니다.  아무리 삼도수군통제사라 하더라도
가난한 군대를 먹이는 군량미 해결은 무엇보다도
막중하기만 합니다.

몇번의 장계를 올려 버려진 땅, 섬을 개간하도록
허락을 받고 돌산도, 흥양, 도양 등에서 운영되는
둔전을 둘러보고 체찰사 이원익이 이순신의 둔전책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칭찬해 주는 모습입니다.

사실 군량미 부족은 왜적들 보다도 더 무서운 적으로
나타나 적과 싸우기 이전에 수군 스스로 땅을 일구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둔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으며
경제적 자립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이순신 장군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구들의 침략과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은 조선초기부터 있어 왔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둔전을 일구기 위해서 다시 섬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
하였으니 이것은 사실상 공도정책이 폐기 된 것이지요.
이순신의 창의적 리더십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겠습니다.

이순신의 둔전책은 피난민들을 버려진 해안가 섬으로
들여보내 수확한 산물의 절반은 피난민이 가지고 나머지
절반은 군대에 보내는, 군사와 백성이 서로 상생하는
것으로 조정에서도 둔전의 개간을 허가하며 호응해
주었습니다.

삼국지의 조조는 둔전을 운영하면서 80 대 20으로
경작자에게 20을 주었는데 이순신은 대범하게도
50 대 50으로 피난민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었으니
그의 지도자적 자질은 이러한 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한 나라의 장수라기 보다는 기업의 CEO 
같은 경세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서도 죄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대안을 찾고 활로를 여는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경제전쟁에서
뚫고 나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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