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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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막지(姜莫只)의 집으로 갔다.....
1597년 10월 16일 (癸酉). 맑다. 우수사(金億秋)와
미조항 첨사(金應諴)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 현감
유형(柳珩)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 죽은
소식을 들은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도 여태 마음놓고
통곡할 수 없으므로, 섬 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의
집으로 갔다. 밤 10시경에 순천 부사(禹致積), 우 우후
이정충(李廷忠), 금갑도(李廷彪), 제포(朱義壽) 등이
해남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왜적의 머리 13개와 적진에
투항에 들어갔던 송언봉(宋彦逢) 등의 머리를 베어왔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마음놓고 통곡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정유년 2월에 의금부로
잡혀 올라가서 국문을 당하고 4월에 백의종군을 가면서
어머님의 상을 당하여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던 무너진 마음을 말입니다.
그런 슬픔도 부족하여 고향을 지키고 있던 세째아들
면의 죽음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디어 낼 수없는
극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소금굽는 종 강막지의
소금창고에 가서 홀로 울음을 삼키며 아들의 혼령을
위로해 주는 아비의 아픈 마음을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삼도수군통제사 이전에 아들의 아비인 것을... 그토록
아꼈던 아들을 왜적의 손에 잃고 왜 통곡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물리치고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였건만 임금은 죽이려 하고 간신들은 모함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어찌 답답하고 원망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쟁 중에도 아들들을 훈육하시며 꿋꿋하게
같이 종군하시면서 세심한 주의와 안전을 위해 애쓰는
애틋한 아비의 정을 일기를 통해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지간의 끈끈한 정을 효(孝)로 행하는 것을
사람의 도리이며 근본으로 알고 있는 우리사회에
요즈음 효의 정신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더욱 더
이순신 장군의 부모사랑, 자식사랑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뉴스에 나오는 정말 눈뜨고 볼수도 들을 수도
없는 부모자식지간의 행실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래서는
안되는데.... 이렇게 근본도 없이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서로 배려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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