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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하였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0-02-10

조회 17,680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1591년 2월 15일)
이때 이순신의 명성이 비로소 드러나 추천하는 논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정읍에서부터 진도
고을 수령으로 옮겨 임명한 후, 미처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 첨사로 임명되었으며, 또 다시 얼마 되지 않아서
전라좌수사로 등용되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대간(臺諫)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두 곳 다 부임
하기도 전에 다시 뽑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水軍節度使)로 임명 하신것을 보면 선조임금께서
그 당시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조선의 국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뜻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의 헷갈리는 보고에
모두 방심하고 있었지만 이순신만이 깊이 걱정하며
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리하며 거북선을 만들며
준비하였기에 임진왜란을 이겨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
수군을 통솔하였는데 해군사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전라좌수영의
기록이 남아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성종10년)에 신설 되었고
그 해 정월부터 축조된 성곽은 1490년 10월에 완성
되었는데 성의 둘레는 3,634척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하에 5관(순천, 흥양, 낙안, 보성,
광양), 5포(사도진, 녹도진, 여도진, 발포진, 방답진)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의승군은 전라좌수군
으로서 정규군으로 편제되어있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대체로 의승군은 휴정(서산대사)를 정점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전라좌수영 산하의 의승수군은 전라좌수군에
자원종군하며 이순신의 지휘에 따라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전라좌수영 인근에 있는 흥국사를 중심으로 삼해(자운),
의능(옥형) 두 승장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약 300명의
승려들이 상비군으로서 전라좌수군에 편제되어 있었으며,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1988년 흥국사 심검당 복원
공사 때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니 흥국사는 주진사(駐鎭寺)
로서 승병이 주둔하여 군사적 기능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5개 수영(水營) 중에 가장 작은 수영이었지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오면서 조선수군의
중심에 서서 지금의 해군작전사령부 역활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영 될때까지
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2016년 충무공 학술 세미나 자료에서 발췌)

경상좌도 수사 박홍은 전쟁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영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경상좌수영은 임진왜란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비교가 됩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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